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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제3차 침입(이동하, 이가현, 김동현, 조지형)


거란의 제 3차 침입


Ernst Schule Internationale



학 년 12학년, 11학년, 10학년


이 름 이동하, 이가현, 김동현, 조지형


2018. 9. 22


거란의 제 3차 침입

지도교사 Kevin


이 Essay를 역사시간 보고서로 제출함


2018년 9월 22일


Ernst Schule Internationale


학년 12학년, 11학년, 10학년




목                 차

Ⅰ. 서론


1. 연구의 방법
...................................................................
1
2. 연구의 목적과 범위
...................................................................
1


Ⅱ. 본론


1. 전쟁 이전 상황
...................................................................
2
2. 강감찬
...................................................................
3
3. 전쟁 과정
-흥화진 대첩과 귀주 대첩
...................................................................
4
4. 전쟁 결과
...................................................................
6


Ⅲ. 결론
...................................................................
7













Ⅰ. 서론

1. 연구의 방법
본 Essay에서는 거란의 3차 침입에 대하여 조사를 했습니다. 대부분 연구의 방법은 인터넷 백과사전과 학술 논문을 이용하였습니다. 또 한 인터넷 백과사전으로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를 이용하였고, 역사책을 이용하여 정보를 찾기도 하였습니다.

2. 연구의 목적과 범위
본 Essay의 연구의 목적은 거란의 3차 침입의 과정을 알아보는 것이 이번 Essay의 연구 목적이였습니다. 연구의 범위는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4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는 전쟁 직전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두 번째 장에서는 이번 거란의 3차 침입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 강감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 세 번째 장에서는 전쟁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크게 흥화진 대첩과 귀주 대첩으로 나눠 조사를 하였고, 마지막 4장에서는 전쟁이 마무리되면서의 전쟁 결과를 알아보았습니다. 이후 결론을 통하여 본 Essay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Ⅱ. 본론

1. 전쟁 이전 상황

거란의 2차 침입 이후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비밀리에 교류를 하였으며, 송에 사신을 보내 송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지만 거란의 침입이 두려웠던 송나라는 고려가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요청을 거부하였다. 고려가 송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야 정도로 벌벌 떨었던 이유는 거란의 2차 침입 때 군사적 예봉, 즉 거란에 인질로 잡혀갈 군사들과 장군들을 보내는 것을 완화 시키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거란의 철수’를 조건으로 하여‘국왕의 친조’라는 조건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이루어지기 힘든 요구였고, 결국 3차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 친조= 왕이 친히 조문한다. 조문의 뜻은 낮은 사람이 윗사람을 보러 간다는 뜻이다.) 이를 이루어 줄 수 없으니 결과적으로 대규모 전쟁은 불 보듯이 뻔해졌고, 고려는 다양한 방비를 시작하게 된다. 산성을 건설하거나 무리하게 징병을 감행했고, 망가진 개경의 방어벽을 재증설 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했고. 중앙 군대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준비 도중 거란은 고려에게 왕의 병이 깊어 친조를 하지 못한다고 전해 듣고 강력히 강동 6주라도 반환하라고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이에 거란은 공식적으로 강동 6주를 빼앗겠다고 선언을 한 이후에 정벌준비에 들어간다. 이후에도 본격적인 침략 전에 소규모로 침략을 계속하지만, 오히려 실패하게 된다. 이에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을 바치며 거란과 고려가 싸웠을 때 어느 쪽에도 붙을 수 있도록 한다. 이러던 도중에 고려에 남은 영업전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발생하고 이에 문신들과 현종은 나라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무신들의 땅을 빼앗게 된다. 이에 죽어라 싸운 후 보답은 없을망정 오히려 뺏긴 무신들은 분노하여 정변을 일으키지만, 이는 현종이 잔치를 벌인다는 명목으로 한 번에 간단히 죽인다. 이 사건으로 군과 나라 사이엔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것에 불안감을 느낀 고려는 다시 한 번 송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지만, 전과 같은 이유로 거절당한다. 요 성종은 고려와 군대에 틈이 생긴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며 대규모의 침략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2. 강감찬

강감찬은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로 유명하다.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네 번째 별로 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그가 태어난 생가 이름이 낙성대이다. 그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이다. 또한 선조는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 강감찬의 기록으로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9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을 때 나이가 16세로 제법 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편이다. 하지만 983년 이후 목종 말년에 예부시랑 될 때까지는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려사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도 강감찬의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대부분 재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강감찬은 현종이 즉위를 한 후부터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몽진을 주장을 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 이 때 <고려사> 강감찬 열전에 의하면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합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하공진으로 하여금 거란 성종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2차 침입 때 몽진을 주장한 것을 언급하며 강감찬의 공을 평가하였다. 이후에도 강감찬은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해서 지금의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이들의 침입을 대비하였고, 많은 곳에서 업적을 남겼다. 제 3차 거란의 침입에서는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고려의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때 강감찬을 위시로한 고려 사령부는 성공적으로 기선 제압을 하였고, 거란구의 전격전을 대비해 청야전술과 유격전, 그리고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포위 섬멸전까지 활용하여 거란 군을 분쇄하는데 성공한다.











3. 전쟁 과정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작고 큰 전투가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거란의 성종은 고려의 현종이 친조할 것을 요구하지만 고려는 이를 지키지 않았고, 송과의 교류를 다시 시작했다. 이와 같이 고려가 거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거란은 고려에 침입하고자 한다. 이 당시 고려내 상황은 무신들의 반란으로 어지러웠다.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본 요 성종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알아채고 침략을 계획한다. 거란의 성종은 1018년 소배압을 도통으로, 소굴렬을 부통으로 임명한 뒤 10만 대군과 함께 고려로 들어가게 했다. 소배입은 거란 1차 전쟁 당시의 사령관으로 서희와 담판을 펼친 소손녕의 형이다. 이에 고려 또한 강감찬을 상원수로,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서 20만 8천여 명의 대군과 함께 영주에 나아 공격을 대비했다. 고려는 거란의 계속된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해온 것이다. 거란군은 고려에 들어올 때 공략이 힘든 흥화진을 우회해서 개경으로 들어오고자 했다. 거란 군은 기존에 흥화진 통주 등을 거쳐서 서경으로 들어왔었다. 이를 바탕으로 강감찬은 그들이 들어올 길을 예측했다. 강감찬은 군사들과 거란 군이 지나가는 길목인 흥화진 인근에 삼교천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거란 군에게 수공을 가했다. 그들은 삼교천 상류의 둑을 큰 동아줄을 꿰어서 이은 소가죽으로 막고 거란 군이 강을 건널 때 막았던 둑을 열어서 그들을 죽였다. 이곳에서 죽은 거란 군은 약 1만 2천명이다. 10만 명의 군사를 끌고 온 거란 군은 처음으로 벌어진 흥화진 전투에서 패했지만, 후퇴하지 않고 계속해서 개경으로 나아갔다. 거란 군은 개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다른 지역은 침입하지 않고, 서둘러 개경으로 나아갔다. 이는 그들의 목적 때문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현종의 친조였으니 곧바로 왕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강감찬은 그들이 지나는 길목에서 주둔하고 있다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개경의 수비대로 보냈다. 개경에 있는 현종은 성 밖에 있는 백성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청야전술을 펼쳐 나름대로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진군한 거란 군은 결국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신은현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거란 군은 더 이상 개경까지 갈 수가 없었다. 고려가 청야전술로 모든 것을 비워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경으로 내려올 때 식량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았었다. 또한 척후로 보냈었던 기병이 금교역에서 전부 죽자, 그들은 회군을 결정했다.


귀주대첩

1019년 2월 1일(음력)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봉하고, 대장군 강민참을 부원수, 병마판관 김종현을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소배압(거란족 출신의 요나라 장군)을 막도록 하였다. 귀주성 앞쪽으로는 2갈래의 하천이 흐르고 그 뒤쪽으로 구릉지대가 있는데 소배압 휘하 장군들은 이 구릉을 끼고 포진하여 고려군이하천 두 개를 건넌 뒤에 공격하도록 유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감 야율팔가가 이에 반대하였고 소배압도 이에 따르면서 거란군은 개천 하나를 등 뒤에 두고 싸우기를 선택했다. 이른바 배수진 물을 등지는 형태의 군진. 일반적으로는 퇴로를 차단시키면 전멸의 위험이 크지만, 대신 이판사판으로 싸우기 때문에 이길 수도 있는 방법. 사기와 훈련정도가 낮아 군대가 와해될 위험이 클때 사용하는 전술이다.
 이다. 당시 고려군은 승기를 잡았고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배수진을 치게 하면 거란군의 사기가 더욱 오르리라고 판단한 것이었고, 거란군도 최정예였기 때문에 서로 배수진을 친다면 우세를 점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섰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전투 경과를 보면 배수의 진을 친 거란군은 2달 가까이 굶주리고 지치고 다쳤음에도, 드넓은 대륙에서 불패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거란의 최정예다운 위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양측 병사들이 끊임없는 전투를 계속할 때 즈음, 이 당시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던 김종현의 1만 병력이 거란군 뒤로 나타난다. 김종현의 1만 병력의 등장은 전방의 고려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던 거란군 더 없이 흔들어놓는다. 김종현과 그의 군대는 전장으로 주저 없이 뛰어들었다. 거기에 그 순간 풍향이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동시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계절상으로는 북풍이 부는 것이 정상인데 간혹 일시적으로 계절풍이 아닌 역풍이 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물었다. 김종현의 1만 군대와 역풍의 영향으로 거란군의 사기는 크게 꺾이며 승리의 기세는 다시 한 번 고려군에게 몰렸다. 거란군은 배수진을 쳐둔 상태라 진형을 재정비할 수 없었고 이내 무너져서 퇴각하는데 이 때 강민첨의 별동대가 이들을 추격하여 반령 벌판으로 몰아넣었다. 추격 부대는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되므로 도망치기에는 최악인 곳으로 내몰린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거대한 포위섬멸전으로 마무리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포위 섬멸전이 그러하듯, 거란군 역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10만 거란 병력 중 살아 돌아간 병력은 수천에 불과했다. 소배압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지만 최고위급 부대 지휘관이 4명이나 죽었을 정도로 고위 계층 장수들의 손실도 컸다.











4. 전쟁 결과

거란은 고려의 3차 침입을 이후로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크게 3가지인데, 하나는 고려가 먼저 화친을 요청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이던 요나라와의 단순한 화친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당시 최고 정예병인 요나라의 기병이 몰살당하는 꼴을 고려가 뻔히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을 취한 것은 서로의 체면치레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이에 거란은 화답이라도 하듯 고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고려는 거란과의 화친으로 송나라나 거란과 어깨를 같이 하는 강대국으로 발 돋음 하였으며 송나라와 거란에게 동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말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허나 이는 얼마가지 못하는데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거란의 황금 발달의 시기는 끝나있었기에 더 이상 거란은 고려와의 전투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수 없었다. 이에 여진족과 몽골족은 거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거란이 후에 망하는 결과가 된다. 하지만 고려는 오히려 더욱 성장하여 북쪽의 강력한 북방력을 바탕으로 자잘한 침입을 막으며 내부가 약 120여년에 이르도록 태평성대를 이루게 된다. 이는 조선이 세워지고 나서도 이 정도로 긴 안정적인 기간이 없을 정도의 발달로 동북아의 강자로 남아있게 된다. 여진은 또한 중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고려와의 전쟁으로 거란이 약해지고 난 이후로 고려의 태평성대가 끝날 때 까지 급성장을 이루어 120 여년 후에는 거란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해진다. 송나라는 여전히 거란에게 애먹으며 세월을 보내다가 후에 여진족을 빌려서 거란을 내쫒으나 그 자리에 여진족이 들어서고, 여진을 다시 내쫒기 급급해져서 아시아 최강으로 불리는 몽골을 끌어오게 된다.










Ⅲ. 결론
본 essay에서는 거란의 3차 침입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거란의 3차 침입을 알아보기 전에 이전에 일어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전 상황에 대해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이 후 거란의 3차 침입에서 가장은 큰 역할을 하였으면 많은 업적을 남긴 강감찬에 대해서 조사를 더욱 깊게 하여 인물에 대한 조사를 중심적으로 하였습니다. 또한 생애를 알아보아 강감찬이 어떠한 인물이 였는지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조사를 하였습니다, 3번째 에서는 본 Essay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전쟁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귀주 대첩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습니다. 이 후 전쟁이 마무리 되는 상황을 알아가면서 본 Essay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다음 Essay에서는 좀 더 목차의 완성도를 높혀 Essay의 완성도를 높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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