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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홍윤재)

임나일본부설

 

서론:1)목적:

2)방법&범위

1)목적: 임나일본부설이 무엇인지 또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목적으로 두었다

2)방법&범위: 미디어를 통해 자료를 찾았고 또 철의 왕국이라는 책을 통해 서술했다. 범위는 임나일본부설과 가야의 역사를 서술했다.

2. 본론

1. 임나일본부설

1) 임나일본부설이란?(2-3P)

2) 근거 & 반론(4P)

 

 

2.

1) 가야의 역사 [5P]

 

 

3. 결론

 

 

 

 

 

 

 

 

 

 

 

 

 

 

 

 

 

임나일본부설이란?

임나일본부설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먼저 용어 정리를 하겠다. 임나일본부설이라는 용어는 임나+일본+부 인데 먼저 임나에 대해 설명하겠다. 임나라는 것은 한자로는 任那 라고 하는데 여기서 라는 것은 땅을 가리킨다. 신라를 한자로 표기하면 신인데 이는 나라를 의미한다. 그러면 이란 무엇인가 한용운의 님의침묵을 한자로 표기하면 의침묵이 된다. 이란 것은 주인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任那라는 것은 主國을 의미 하는 바가 된다. 그 다음은 일본이란 용어인데 섬나라 일본을 칭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는 부이다 이는 조선총독할 때 의 이다. 신공기에 따르면 신공왕후가 신라를 치러 갔다가 가야 7국을 점령하고 전라남도 일대를 평정하였다 하고 기록되어있다. 신공왕후가 신라를 치러 간 이유는 14대 중애천황이 규슈 남부 지역을 정벌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공왕후가 이를 만류하면서 신라라고 하는 금이 풍부한 나라가 있는데 그 곳을 치자고 했다, 그러나 중애천황은 아내인 신공왕후의 말을 듣지 않고 규슈남부 지역을 정벌하러 갔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신공왕후는 만삭의 몸을 이끌고 직접 신라를 정벌하러 간다. 이 때 신공왕후가 직접 신라를 정벌하러 간 데도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 이유가 기록되어있다. 임신한지 2년이 되었는데 왜 나오지 않냐 하고 신공왕후가 태아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아는 신라를 점령할 때 까지는 나오지 않겠다고 대답 했다고 한다. 이에 신공왕후가 신라를 정벌 하려고 대한해협을 건너 당도하자 직접 신라왕이 나와 항복을 했고 고구려의 왕과 백제의 왕도 따라서 항복을 했다고 전한다.[일본의 검정교과서에는 391왜가 신라와 백제를 신하로 삼았다고 쓰여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도 임나일본부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이 임진왜란의 원인이 된다는 기록은 없다. 이는 정한론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임나라는 것이 일본의 역사서에서만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강수편이 보면 강수는 본래 임나가량 사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임나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그 뜻을 해석할 때 일본과 한국의 입장이 다르다. 한국의 입장은 일본에서는 관청을 읽을 때, 예를 들면 경도부 대판부 등 라고 표기하는데 일본서기에는 기록이 없다. 또 만약 라면 세금징수 , 군사징발 , 우마징발 등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일본서기에 임나에 대해 총 23번 언급이 되는데 오직 외교의 내용만 있다, 在伽耶 諸倭民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아라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을 뜻하고 그곳에 있는 왜 신하를 뜻한다] 사실 임나일본부설은 1970년이 되면 일본의 학자들 중에서도 이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일부 무지한 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2장에서는 이 학자들은 어떠한 근거를 토대로 아직 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서술 할 것이다.

      

 

 

2. 근거 & 반론

먼저 근거를 서술하겠다. 첫 번째 근거로는 광개토대왕릉비 의 비문을 가지고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비의 비문에 내용 때문이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비어있는 공간은 문자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거나 없어진 문자이다] 왜가 신묘년 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이 비문을 가지고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1930년대 사학자 정인보는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가 그를 위해 세운 비이니 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닌 고구려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되면 신묘년에 왜가 당도하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무찌르고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가 된다. 이 비문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羅以爲臣民인데 이는 영락 6丙申년에 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잔국을 쳤다. 라는 문장이다. [신라의 내물왕이 왜의 침입으로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함] 현재 사학자들은 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이 비문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잔과 왜를 친 원인으로 해석해야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 비문을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무기의 차이이다. 전쟁이란 것이 전술과 뛰어난 참모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고대의 전쟁이란 것은 무기가 승패를 좌지우지한다. 당시 왜의 제철기술은 가야에 비해 매우 형편이 없었다. 가야의 대표적인 철제무기라면 環頭大刀이다. 環頭라는 것은 칼의 손잡이 끝에 둥근고리가 있는 모양이고 라는 것은 한쪽 부분만 날카로운 날이 있는 것을 말한다.[휘둘렀을 때 두 부분에 날이 있다면 내 이마나 얼굴에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한쪽에만 있다면 그런 일이 없어진다] 는 검하고 다르게 상대를 쉽게 베고 또 막기까지 할 수 있어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한다. 두 번째 근거로는 칠지도 이다. 칠지도의 새겨있는 문장을 가지고 일본과 한국의 해석이 다르다. 일본 측은 백제가 천황에게 를 받친 것이고 한국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칠지도의 새겨 있는 문장을 살펴보면 앞면에는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以. 百兵 宜供供候王 □□□□이라고 쓰여 있다. 4511일 병오년 정양 때에 백번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적군을 물리칠 수 있으니 마땅히 후왕에게 줄 만하다 □□□□. 후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예로부터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백제왕 치세에 왕의 명을 받들어 왜왕 지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잘 전하여 보여주어라. 일본은 이를 백제가 제후국인 일본을 위해 칠지도를 만들어 받친 것 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하게 백제가 일본에게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다. 칠지도를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어 하사한 것이므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백제의 왕세자와 일본의 천황이 같은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임나 지역을 평정하고 일본를 세워 지배 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것 같다.

3. 가야의 역사

가야의 역사는 600이 될 정도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고대사에서 三國하고는 달리 많이 잊어졌다. 가야는 慶尙道와 그 주변을 흐르는 洛東江을 중심으로 기원전 ~562년 까지 존재 했던 국가이다.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고려가야[함창], 성산가야[성주], 비화가야[창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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