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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壬辰倭亂 : 朝鮮을 빛낸 名將 ESSAY - Jongyun, Seonhwa, Saechan etc

壬辰倭亂 : 朝鮮을 빛낸 名








Ernst Schule International







Grade 11, 12

Name: 최종윤, 김세찬, 이선화




2020. 9. 30




壬辰倭亂 : 朝鮮을 빛낸 名





이 Essay를 『길 위의 인문학』참가 보고서로 제출함






Teacher Kevin




2020. 9. 30





Ernst Schule International

최종윤, 김세찬: Grade 11, 이선화: Grade 12



CONTENTS

Ⅰ. Introduction.......................................................................................................4

1. Purpose of Investigation....................................................................................4

2. Method and Range of Investigation.................................................................4


Ⅱ.壬辰倭亂.............................................................................................................5

  1. Background.........................................................................................................5

2. Process................................................................................................................6


Ⅲ.閑山島大捷..........................................................................................................8

1. 閑山島大捷 이전 상황과 배경..........................................................................8

2. 閑山島大捷 과정과 조선의 전술.....................................................................10

3. 閑山島大捷 결과와 의의..................................................................................11

Ⅳ.幸州大捷............................................................................................................13

1. 幸州大捷 이전 상황.........................................................................................13

2. 幸州大捷 전개 과정.........................................................................................13

3. 幸州大捷 결과와 의의.....................................................................................16

V.晉州城大捷.........................................................................................................17

1. 第1次 晉州城大捷.............................................................................................17

2. 第2次 晉州城大捷.............................................................................................19

3. 晉州城大捷 결과와 의의..................................................................................20


VI. Conclusion........................................................................................................21








Ⅰ. Introduction

1. Purpose of Investigation

본 essay는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년에 조선을 쳐 들어온 사건이다. 본 essay에서는 일본이 조선에 입힌 피해와 그로인해 발생된 가장 중요한 3가지 대첩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을 지켜낸 장군들이 어떠한 공을 세웠는지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왜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성대첩이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손꼽히는 지, 왜 우리가 임진왜란 3대첩을 알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우리가 살지 못했었던 시대에 이러한 사건이 있었는데 우리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글로라도 남아 있는 이 사건을 알아야 하므로 본 essay를 쓴다. 


2. Method and Range of Investigation

본 essay는 인터넷의 정보와 임진왜란에 대한 서적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 본 essay는 제 1장 서론과 제 6장 결론을 제외하면 본론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론의 첫 번째 장, 주제는 壬辰倭亂에 대한 이야기를 세세하게 다룬다. 壬辰倭亂의 배경과 과정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본론의 두 번째 장, 주제는 閑山島大捷에 대한 내용으로 閑山島大捷의 이전 상황과 배경부터 내용이 시작된다. 閑山島大捷 때의 과정과 조선의 전술, 閑山島大捷의 결과와 의의까지 설명한다. 본론의 세 번째 장, 주제는 幸州大捷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幸州大捷의 이전 상황부터 幸州大捷의 전개 과정, 그리고 결과와 의의까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본론의 마지막 장, 주게는 晉州城大捷의 이야기를 다룬다. 晉州城大捷의 1,2차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다루고 있으며, 그의 결과와 의의까지 내용을 포함한다. 



Ⅱ.壬辰倭亂

1592년 조선 땅에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보이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조선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장군들이 있었으니 ..


  1. Background

임진왜란은 조선의 선조가 왕위에 있을 때에 일어난 일본과의 전쟁이다. 임진왜란의 배경을 알아보려면 선조 이전, 명종 때의 사건들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조선은 문치주의 사회였다. 문치주의는 유교 이후에 등장한 정치사상인데, 학문의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는 사상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자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따라서 정치에서 무인의 위치를 낮추거나 아예 제외하고, 문인들을 주요 정치인으로 내세웠다. 문인들만 대우를 받고 중요하게 여겨지다 보니 갈수록 국방에 대해 소홀해지며 거의 무방비 상태를 초래하였다. 그나마 조선 초기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사훈련을 하였으나 평화로운 시기들이 지속되면서 국방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졌다. 이것에 대한 결과로 1555년, 을미왜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을미왜변은 왜구들이 우리나라 전라남도 영암,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한 사건이었다. 침입해온 왜구들의 수가 막기 어려울 만큼 크지도 않았으나, 워낙 조선의 국방이 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막지 못하였다. 이후에 조선은 군사들을 훈련하는 데에 더 열심히 관리해야 했지만 오직 비변사만 설치하고 끝냈다. 비변사는 상설기구도 아닌 비상시 임시기구였다. 심지어는 비변사의 최고 자리에도 무신이 아닌 문신이 차지하며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하였다. 명종에 이어 선조가 왕위에 올라있을 때에도 조선의 군사력은 계속 약화된 상태였다.

반면, 일본은 당시 군사력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 일본은 약 100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상태였다. 100여년을 걸친 전국시대 내내 전쟁을 수도 없이 많이 했으니 일본의 군사들은 모두가 정예 군사였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무기 역시 강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까지 정복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사신들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이때의 대표적인 두 사신이 황윤길과 김성일 이였다. 황윤길은 일본에 다녀와서 선조에게 일본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침입해 올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반면,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가 전혀 아니라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선조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 보다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을 따르며 김성일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일본이 쳐들어올 가능성은 없으니 안심하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2. Process

1592년 임진년 봄, 대한민국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두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전쟁을 대비해 준비하기 위하여 모두 일본으로 조금씩 철수하였다. 그리고 1592년 5월 23일, 일본군들이 부산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조선은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전쟁을 준비하였다.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손꼽히는 것이 상륙작전인데, 무방비 상태의 조선은 일본의 부산 상륙작전을 쉽게 허락하고 말았다. 부산에서 조선군은 일본을 상대로 열심히 싸웠으나 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부산을 점령하고 한양을 향하여 계속하여 진군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상현과 같이 용맹한 장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장군과 군사들은 겁을 먹고 도망가기 바빴다. 결국 일본이 한양에 가까워졌다. 

당시 선조는 신립장군의 부대를 믿고 있었다. 신립장군이 이끄는 기마부대는 그나마 조선에서 가장 강했던 부대였다. 선조는 이 신립부대가 일본군이 한양까지 점령하지 못하도록 충분히 막아 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립장군의 부하들은 그들의 튼튼한 요새였던 조령에서 자리를 지키며 일본군과 맞서 싸우자고 하였다. 조령은 한강으로 가는 지름길과 같았기에 조령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을 물리치자며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조령은 산맥이 많아서 기마병의 활용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신림장군은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을 기다리자고 명하였다. 배수진은 강과 같은 물을 등지고 진을 친다는 뜻인데, 이렇게 하면 아군이 뒤로 후퇴할 길이 없게 진을 친다는 것으로, 일본과의 전투에 결사적인 각오로 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결국 신립장군의 뜻에 따라 탄금대에 강을 등지고 진을 쳤다. 그런데 전투 당일, 비가 많이 내려서 강이 넘치고, 바닥이 모두 진흙이 되고 말았다. 말들은 진흙탕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했고, 발이 땅에 박혔다. 일본군들은 조총과 같은 무기들로 진흙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말들과 말을 타고 있는 조선군들을 모두 죽였고, 결국 일본이 승리하고 말았다. 이에 신립장군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조선군의 패배 소식과 신립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선조는 곧 한양에 일본군이 들이닥칠 것을 알고 급히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하고 자신은 평양으로 도망 가 버린다. 이때 광해군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하였다. 선조는 일본군이 평양까지 추격해 오면 중국으로 까지 도망 갈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은 한양을 끝으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였다. 조선의 반격이 시작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일본군들을 막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많은 대첩들이 탄생하게 되는데,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는 한산도대첩, 진주성대첩, 행주대첩이 있다. 













Ⅲ. 閑山島 大捷

한산도대첩은 1592년 8월 14일, 통영 한산도의 앞바다에서 일어난 조선 수군과 왜군 사이에 일어난 해전이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어난 대첩이며, 중요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1. 閑山島 大捷 이전 상황과 배경 

신립 부대의 패배, 선조의 도망 이후, 정부의 관군은 계속하여 일본군에게 패하였고, 겁먹고 달아나는 조선군의 수도 적지 않았다. 일본이 한양까지 점령하게 되면서 나라 전체가 일본군에게 짓밟혔고 조선 전체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의 마을과 가족을 직접 지키기 위하여 두 팔을 걷어 나섰다. 마을마다 그 마을을 이루던 양반, 농민, 노비 신분에 가리지 않고 모두 모여 군대를 형성하였다. 각 마을 군대는 마을 양반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고 지식이 많은 사람을 대장으로 내세웠다. 이들을 의병이라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여러 마을의 의병 군대가 합쳐져서 더 큰 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의병들은 일본에게 힘없이 밀리던 조선 육군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의병 부대의 군인들은 마을의 지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마을 곳곳에 숨어있다가 좁은 골목 등의 장소에서 갑자기 나타나 일본군을 기습공격 하였다. 이와 같은 전술은 큰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임진왜란 때 최초로 기의한 의병장은 바로 곽재우 장군이다. 곽재우(1552~1617)는 경상남도 의령현 세간리 출신이었다. 그는 일본군이 처음 침입해 온 부산과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살던 백성이었기에 다른 지역의 의병들 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훨씬 빨리 알아차리고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곽재우 장군은 자신의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거느리던 노리 10명과 시작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이웃 양반들과 마을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한 결과, 50여 명 까지 의병의 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약 2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모아 의병부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은 부족한 식량과 무기를 얻기 위하여 초계성을 찾아갔다. 당시 초계성은 정부의 관군들이 모두 달아나서 비어있었다. 이곳에서 무기와 군량을 확보한 곽재우 장군의 의병부대는 의령을 거점으로 하여 현풍, 영산(지금의 창녕), 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처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은 정암진이었다. 정암진은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강의 나루로, 영남지방에서 호남지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정암진에서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부대와 일본군이 싸우게 되었는데, 곽재우 장군은 주변 환경을 고려한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얻어냈다. 이 정암진 전투는 임진왜란 도 중 육지에서 조선군이 승리한 첫 번째 전투였다. 또한 정암진 전투는 일본군이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곽재우 장군과 그의 의병부대는 이후에도 계속 경상도에서 활약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들의 또 다른 주요 업적은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었다. 곽재우 장군은 일본군의 보급을 방해하면 큰 타격이 된다는 것을 알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곽재우 장군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이 보급물자를 이동하기 위해 이용하는 강의 길을 파악하여 미리 강바닥에 말뚝을 세워놓았다. 그러면 일본의 보급선이 그 강의 길을 지나갈 때에 말뚝에 걸려서 배가 전복되었다. 이에 주변에 숨어있던 의병들이 나타나 배가 망가진 혼란을 틈 타 일본군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이렇게 일본군을 제압하는 데에 큰 도움을 기여한 곽재우 장군은 벼슬을 받으며 계속 승진하였고, 경상도를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의병들이 육지에서 활약하여 일본군들을 제압할 동안 바다에서도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이때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며 활약한 장군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의 지휘 하에 조선 수군은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등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일본 수군을 대패시켰다. 일본은 이순신 수군을 먼저 없애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일본의 두 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한반도 북쪽에서 조선군을 밀어붙일 동안,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라는 지휘관은 전라도를 침략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전라도는 이순신의 본영을 육지에서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지역이었으며, 또한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였기에 일본의 입장에서 차지하면 이익이 많은 지역이었다. 타카카게 장군은 안코쿠지 에케이 라는 승려출신의 장군에게 약 2000명의 군인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지원해주어서 전라도로 먼저 진군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때 안코쿠지 에케이의 부대는 곽재우 의병부대에게 패배하여 일본의 첫 전라고 침략을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의병의 중요성을 크게 깨닳은 선조와 조정에서는 초유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의병을 더욱 많이 모을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곽재우 의병부대와 같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들도 국가의 정식 군인으로 인정하여 무기와 식량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1592년 6월 말에는 일본 수군이 이순신 함대에 계속 패배 당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장군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남쪽으로 파견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본 수군 최고 지휘관들이었던 가토 요시야키와 구키 요시타가와 조선 수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작전회의를 하였다. 이 지휘관들 중에서도 구키 요시타카는 오다 노부나가의 피하에서 큰 공을 여러번 세웠는데, 덕분에 일본 전국시대의 최고 수군 지휘관 이라고 평가되던 인물이였다. 세 장군들은 합쳐서 115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구성해서 이순신 장군의 본영이 있는 여수로 향했다. 이때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의 73척의 배를 이끌고 견내량 이라는 지역에 진을 치고 대기하였다. 일본 수군의 접근 소식을 들은 이순신 장군은 7월 6일, 배들을 이끌고 접근해 오는 일본 수군을 경계하기 위하여 출동한다. 이때 조선의 배는 판옥선이었는데, 이순신장군의 24척, 이억기장군의 25척, 그리고 원균장군의 7척이 출동하였다. 이렇게 56척의 판옥선에 거북선 3척도 함께 진군하였다. 이것이 한산도 대첩의 시작이다.  




2. 閑山島 大捷의 과정과 조선의 전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일본수군을 이끌고 통영과 거제 사   이의 바닷길인 견내량에 주둔하였다. 한편 이때의 조선     은 당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견내량에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순신, 이억기, 원균 이렇   게 3명의 장군은 작전회의를 하였다. 이때 원균장군이 견내량에 모여 있는 일본군이 새로운 대형을 만들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견내량에 모여있는 일본군을 향해 한꺼번에 가서 공격하자고 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장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견내량의 지형을 먼저 살펴본 이순신장군은 견내량이 좁고, 암초가 많기 때문에 판옥선 수십척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전투를 벌이기에는 조선이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배의 수가 조선보다 많았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한꺼번에 싸우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이 이순신장군의 의견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은 배 몇 척을 먼저 견내량으로 보내서 일본군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여 싸우는 것이 조선군에게 유리하다며 이에 따른 작전을 내세웠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선택한 전투 장소가 한산도 앞바다였다. 전투의 날이 밝자 조선군은 견내량으로 향하였다. 이순신장군은 판옥선 5척을 먼서 견내량 안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판옥선 5척으로 구성된 조선의 유인함대는 일본군 함대와 만나 약 30분간 접전을 벌였다. 30분 뒤, 조선군은 공격을 멈추고 배의 방향을 돌려 견내량 밖을 향하여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군의 함대 모두는 돛을 올리고 조선의 유인함대를 추격하여 뒤따랐다. 좁은 견내량의 바닷길에서 빠져나오니 넓은 한산도 앞바다가 펼쳐졌다. 그리고 한산도 앞바다에는 조선군 본진이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은 학익진 이라고 불리는 대형으로 진을 쳐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익진이란 학의 날개 모양처럼 생긴 대형인데,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과 같이 약간 둥근 아치를 이루는 대형이다. 일본군이 유인함대를 따라서 조선의 학익진 대형 앞에 다다르자, 학익진 양 끝에 주군하던 조선 판옥선부터 차례로 앞으로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순식간에 조선군은 일본함대를 둘러싸는 대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서 가운데에 갇히게 된 일본 함대를 향하여 포격을 퍼 부었고, 거북선 3척은 일본함대 사이사이를 누비며 공격하였다. 이에 일본함대는 속수무책으로 조선군에게 당하였는데, 이때 적군의 배 59척이 깨졌고, 일본군 약 9000명이 전사하였다. 

조선은 학익진 전술로 일본을 상대로 크게 승리를 쟁취하였다. 학익진 진법은 U자형 대형으로 적에게 진군하는 전술이다. 진군하여 적의 함대를 크게 감싸는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그러려면 대형을 잘 맞추어서 대형을 구성하는 모든 배가 일정하고도 재빠른 속도로 진군하여야 한다. 이때 뱃머리가 적을 향하게 되는데, 뱃머리의 폭은 배의 현보다 좁기 때문에, 사격을 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군하여 적을 둘러싸는 대형을 빠르게 취한 다음, 포격을 퍼부어야 했다. 이렇게 학익진이 기동과 사격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을 성공시키면 이와 같이 유리한 전술이 없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들이 사용했던 조선의 총통에도 단점이 있었다. 당시 조선의 총통은 화약과 총알을 따로 장전했어야 했다. 또한 단발이였으며, 다시 장전하려면 총통이 살짝 식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따라서 장전 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이순싱 장군은 2중 학익진 대형을 만들어냈다. 첫 번째 줄, 두 번째 줄로 나누어 2중으로 학익진 대형을 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앞 줄과 뒷 줄이 번갈아가며 사격을 하게 하여 사격의 공백기를 줄이게 되었다. 판옥선의 구조 역시 조선의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의 함대는 배의 깊이가 깊고, 밑 부분이 뾰족했다. 덕분에 일본함대들은 판옥선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진군할 수 있었으나, 배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와 달리, 배의 밑부분이 비교적 평평했던 판옥선은 상황에 따라 배의 방향을 신속하게 전향할 수 있었다. 또한 판옥선은 날렵한 유선형 대신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배의 4면에 모두 총통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방향을 바꾸기에 유리하고, 총통을 배의 4면에 모두 장착할 수 있었던 조선군은 배를 돌려가며 사격을 하여 이것 역시 사격의 공백기를 줄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이순신 장군의 전략과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한산도 대첩은 조선의 대승으로 끝을 맺었다.


3. 閑山島 大捷의 결과와 의의     

한산도 대첩은 단기간에 승부가 결정되었다. 조선 수군은 배 1척의 손실도 없이 일본은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이 한산도 대첩에서 패배한 이후 이틀 뒤에,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사이에 안골포 해전이 벌어졌다. 안골포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가 일본의 함대를 지휘했는데, 이때 일본 함대는 수가 거의 100여척에 달하는 대함대였다. 하지만 이 거대한 함대는 3일만에 조선 수군에게 또 다시 격파당하고 말았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 이상 조선과의 해전에 큰 의미를 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해전 대신에 해안선은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로써 한산도 대첩은 남해의 제해권을 조선이 되찾는 결정적 결과를 일으키게 되었다. 일본이 먼저 부산에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조선을 침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을 포함한 남해 지역을 조선군이 다시 되찾음으로써 조선군의 사기도 복돋아 주었다. 류승룡은 그의 책인 징비록에 한상도 대첩 한 번의 전투로 적의 팔 하나를 잘랐다고 기록하며 한산도 대첩을 높게 평가하였다. 또한, 이후에 대한제국에서 선교사로써 활동했던 Homer Bezaleel Hulbert는 한산도 대첩이 조선의 Battle of Salamis라고 하였으며, 임진왜란 중에서도 이 해전이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하였다.           

 

 








. 幸州 大捷 

임진왜란 대첩 중 유명한 전투 중에 빠진 적 없는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 성 안에 있는 부녀자들까지 합세하여 행주치마로 돌덩이를 운반까지하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던 전투이다. 


1. 幸州 大捷 이전 상황

1592년 10월, 晉州城에서의 막대한 피해를 본 日本軍은 상황이 악화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보급을 끊긴 채, 평양성에서 버티고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심유경과의 50일 휴전 협정으로 인해 공격과 퇴각조차 하지 못했다. 심유경은 朝鮮의 일부를 넘기고, 日本에 명나라 사신을 보낸다는 약속으로 50일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협정을 맺었다. 심유경의 본래 목적은 일본 무기 견본을 하나씩 받아와 일본 무기를 버틸 만한 갑옷을 만들고자 했다. 심유경을 통해 명나라는 50일 동안 시간을 얻고서 강물이 어느 12월이 되자 제독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이 조선에 들어왔다. 이여송은 명나라 명장으로 알려진 이성량의 아들로 류성룡과 만난다.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 명나라 군이 왔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심유경을 기다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50일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심유경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부하 장수 다케우치를 심유경에게 보냈다. 심유경은 계획대로 다케우치를 붙잡았고, 붙잡히지 않은 병사만이 평양성을 돌아갔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소식을 듣고 전투를 바로 준비하였다. 1593년 음력 1월 6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한다. 조명연합군은 이틀 동안의 백병전을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를 파악했고, 이틀 뒤부터 제대로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日本軍은 수적으로도 불리하자 평양성을 두고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6개월 만에 평양성을 탈환할 수 있었다. 평양성을 탈환하고서 명나라 군은 碧蹄館 戰鬪에서 日本軍에게 대패를 당하고서 幸州 大捷의 시작의 막을 연다.


2. 幸州 大捷 전개 과정

권율(權慄)은 조선 중기의 명장수 중 한 사람이다. 46세의 나이에 관직에 올랐고, 6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서 수도가 함락되자 이광과 곽영이 4만 여명의 군사를 모았는데, 그때 권율(權慄)은 광주 목사에 있었으며, 의병 1000명을 모집해 금산군 이치 전투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하였고, 또한 독성산성 전투을 통해 공을 얻고서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權慄)은 日本軍이 碧蹄館 戰鬪에서 주도권을 잡았을 때, 관군을 이끌고 北上하고 있었다. 수원 독산성에서 日本軍을 격파하고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조방장 조경을 보내 병력이 주둔할 만한 곳을 물색하다가 고양의 幸州 山城에 진을 쳤다. 幸州 山城은 삼국시대에 축조한 토성일 뿐이었다. 海拔 124.9m의 덕양산에 있었으므로 그리 높지 않았다. 행주산성의 남쪽 한강변과 동쪽 창릉천변은 절벽과 경사가 심해 침투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후방보다는 전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라병사 선거이의 병력 4천을 지금의 시흥 땅인 금천에 주둔토록 하고 幸州 山城 건너편인 양천에도 병력 1천을 배치해 일본군이 幸州山城을 공격할 때 후미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진지 후에는 여러 개의 가마솥을 준비하여 방화용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적의 화공작전에 대비해서 젖은 수건과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한 자루씩 허리에 차게 하였다. 幸州 山城에 들어간 권율(權慄)은 적의 공격을 대비하여 목책을 세웠다. 목책을 세우고 사흘 뒤, 日本軍이 幸州 山城으로 쳐들어왔다. 일본군의 수는 3만, 幸州山城에 주둔한 병사의 수는 1만 채 되지 않았다. 병사의 수가 적었던 권율(權慄)에게는 막강한 화력이 이용되었다. 변이중이 개발한 火車, 飛擊震天雷 등 험준한 지세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火車는 이동하면서 한꺼번에 여러 개의 총통이나 신기전을 쏠 수 있도록 만든 무기이다. 朝鮮 時代 太宗 1409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高麗 時代 말 최해산이 火藥 무기를 발명하다 만


든 무기로 진포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쳤던 최무선 장군의 아들이다. 火車는 太宗 때 만들어지고 점차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 후에, 朝鮮 五代 王인 文宗이 만든 火車가 있다. 文宗의 아이디어로 직접 文宗火車를 만들었다고 한다. 3명의 군사만으로도 100명이 넘는 軍事力이 나올 수 있게끔 하였다. 文宗火車 이후에 四箭銃筒에서 宙字銃筒 50개를 사용해 만들었고, 壬辰倭亂, 특히 幸州大捷에서 큰 역할을 했던 변이중의 文宗火車가 있었다. 변이중이 文宗火車를 개량하여 만든 火車였다. 수레 위에 40개의 승자총으로 총통기를 설치하였고, 총의 심지를 이어서 쏘게도 하였다. 두 번째 사진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이다. 선조 때 이장손이 발명한 군사목적 폭탄(지금의 보물 제 860호)이다. 내부는 화약과 빙철 등으로 장전되어 있고, 완구에 의해서 목표물에 발사하는 형식이다. 幸州 大捷에 유용하게 쓰인 무기 중 하나이다. 그 밖에 화약 무기들 또한 많았다. 

많은 준비를 하고 있던 권율에 비해 日本軍의 총대장인 우키타는 병력을 7개 부대로 세웠으며, 1593년 음력 2월 12일 새벽 공력으로 제 1부대인 고니시를 앞세운다. 고니시는 평양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碧蹄館 戰鬪에는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幸州 山城에서 날아오는 포탄, 돌, 화살에 밀려서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제 2부대인 이시다 미쓰나리, 제 3부대인 구로다 또한 조총수를 앞세운 것 뿐이었고, 조방장 조경의 대포를 쏘게 하여 조총 부대를 격파해버렸다. 선발 부대가 격파당하자 총대장인 우키타가 나섰다. 선발 부대와 다르게 산성을 빠르게 밀고 올라갔다. 제1저지선인 제 1성책이 무너지면서 朝鮮郡이 당황을 했으나 권율 장군이 직접 나서서 진정시켰으며 다행이 제 2성책은 지켜내었다. 그 와중에, 우키타는 부상을 입었다. 제 4부대가 물러나자 요시카와 히로이에가 제 5부대를 이끌고 화통으로 성책 안에 불을 질렀지만, 朝鮮郡의 대처로 빠르게 꺼버렸다. 요시카와 또한 돌과 화살로 인해 부상을 입고 퇴각하였다. 이제는 제 6부대가 모리와 고바야카의 지휘 아래 공격했지만, 처영이 이끄는 승병에 의해 격파시켜버린다. 다음, 제 7부대가 들어오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朝鮮郡과 日本軍의 백병전이 시작된다. 이때, 성 안에 있던 부녀자들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입고 돌을 담아 날랐다. 幸州 大捷의 幸州가 이렇게 유래되었다. 朝鮮郡과 日本軍은 서로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 되었을 때, 朝鮮郡이 수적으로도 열세이자 무기까지 떨어졌었다. 그런 상황에 幸州 山城 후방에 있는 한강 쪽에서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을 수 만 개를 실은 배 두 척을 몰고서 日本軍 후방으로 향했다. 당황하기 바빴던 日本軍은 바로 퇴각했으며, 승기는 朝鮮郡의 손에 들어왔다. 日本軍 3만 대군을 물리친 힘겨운 싸움이 바로 幸州 大捷이다. 幸州 山城에서 권율(權慄) 장군이 승리하자 파주산성으로 가 진을 쳤으며 한성 수복을 위해 노력했다.


3. 幸州 大捷 결과와 의의

幸州大捷에서 조선군의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이여송이 접하자 평양으로 퇴각한 것을 후회했다. 한성으로 퇴각한 日本軍은 히데요시에게 약간의 피해가 있었다고 축소하며 보고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농성 작전을 펼쳐야겠다는 요구하였다. 日本軍이 한성에 버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3월 중순에 한성에서 철수 명령을 내린다. 日本軍이 가만히 철수하게 냅두지 못하는 朝鮮郡이었기 때문에 우키타는 이여송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명과 日本 사이의 강화 교섭을 추진하고 명의 군대는 요동 지방으로 철수를 부탁했다. 이여송은 흔쾌히 허락하려했으나 朝鮮郡의 거센 반발로 인해 마찰이 일어났지만, 조명연합군 총지휘권을 가진 요동경략 송응창이 나서서 日本軍 공격을 전면 중단할 것을 강압했다. 또한, 심유경을 앞세어 日本軍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라고도 했다. 결국, 한성에 주둔한 5만 3천의 日本軍은 방해없이 4월 17알 경상도 지역으로 물러났다. 3일 후에 4월 20일 조명연합군은 한성에 도착하고 도성이 함락된 지 1년 만에 수복했다. 한성에서 日本軍을 물러나게 한 가장 큰 원인은 권율(權慄)의 幸州大捷에 있다. 일본군은 경상도로 내려가 본국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V.晉州城大捷

日本과 朝鮮의 총 2차례에 걸쳐 진행된 전투로 임진왜란 3대 大捷이라 불리는 한산도大捷, 행주大捷 사이에 가장 치열했었던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第1次 晉州城大捷 배경과 과정

1592년 음력 5월 35일, 日本軍 16만 대군이 朝鮮을 쳐 들어왔다. 日本軍은 20일 만에 서울 도성이 함락 시켰다. 곧이어 日本軍은 명나라까지 치기 위해 평양을 넘어 함경도까지 넘어가 점령했다. 반면, 후방 日本軍은 晉州城을 노렸다. 日本軍은 북쪽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식량보급이 어려워지자 朝鮮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치기위해 우선 晉州城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략에 후방 日本軍을 晉州城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朝鮮도 이미 晉州城이 중요한 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日本軍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많은 병력으로 晉州城의 주변 지역들을 점령해가며 폭을 좁혀왔다. 1592년 7월, 日本軍은 고성을 점령하였다. 8월, 日本軍은 진주를 위협하고, 日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朝鮮의 김시민 장군은 晉州城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그에 日本軍은 사천성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1000명의 군사로 사천성에서 日本軍을 격파하며 고성까지 탈환하였다. 왜군은 8월 중순부터 晉州城 침략 준비에 귀를 기울였다. 왜군은 우키타 히데이에가 이끄는 3만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노현, 원, 함한 등지에서 朝鮮軍을 격파한 후 晉州城으로 향했다. 1592년 음력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晉州城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음력 10월 4일, 日本軍은 군사 3만 명을 이끈 채로 晉州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朝鮮에는 목사 김시민, 권양군수 이광학, 진주판수 성수경, 전만호 최동양, 율포권관 이창종, 권관 이계종이 있었다. 朝鮮軍은 약 3천 8백 밖애 되지 않았다. 병력 수는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났다. 약 10대 1의 싸움이라고 봐도 무관했다. 총 6일간의 격. 日本軍은 晉州城 동문을 둘러 싸 晉州城 동문의 선학제, 봉명루(의병루), 향교 뒷산에서 포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晉州城의 동문은 완전히 둘러싸인 것이다. 日本軍은 晉州城 주변에 불을 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며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성내에 있는 朝鮮 관군은 화차, 玄字銃筒, 화살과 총포로 대항하였고, 백성들도 이를 도왔다. 백성들은 돌과 뜨거운 물로만 日本軍에 대항하는 데에 힘을 썼다. 의병장 곽재우는 유걱전을, 의병장 최경회, 임계영은 전라도 의병 2천명과 함께 日本軍의 후방을 공격했다. 日本軍은 되 리어 朝鮮軍에게 포위된 꼴이 되었다. 음력 10월 10일, 日本軍은 6일간의 전투로 약 10대 1의 싸움에 패배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며 퇴각하였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목사 김시민은 전사하고 만다. 음력 10월 9일 전투 승리를 하루를 앞둔 채 日本軍의 총탄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이후 치료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향년 39세로 음력 10월 18일 순국하고 만다.





<晉州城 전도>


2. 第2次 晉州城大捷 배경과 과정

임진년 1592년 11월 8일부터 13일까지 치루어진 제 1차 晉州城 전투는 日本의 참패로 끝이 났다. 그러나 朝鮮에는 목사 김시민의 죽음만큼 큰 손실이 없었다, 日本軍은 병력에 큰 피해를 보았음에도 晉州城에 대한 보복 작전을 꿰고 있었다. 그리고 계사년 1593년, 日本은 거의 모든 병력을 데리고 군사 10만 명과 선박 800척을 앞세워 함안, 반성, 의령을 다시 점령하고 晉州城으로 향했다. 이 이전에는 朝鮮과 명나라의 조명연합군이 있었다. 日本은 晉州城을 점령하기 위하여 명나라와 화의를 교섭하고 日本은 이 틈을 타서 朝鮮의 晉州城을 공격한다. 朝鮮은 성 내부에 3천 밖에 되지 않는 병사만이 있었다. 대구, 남원, 상주의 명군들은 10만의 日本 군사들과의 전투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며 수성을 포기하라고 전달했다. 1차 晉州城 전투에서 활약했던 의병장 권재우는 의병들을 데리고 晉州城으로 향하던 길에 10만의 日本軍을 보고서 晉州城을 포기했다. 그러나 城 안에 있던 충청병사 ‘황진‘을 포함한 관군들과 민병들은 晉州城에 남아 끝까지 日本軍에 대항하여 방어를 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짐했다. 晉州城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누어져있다. 그러나 1차 晉州城 전투 때 이미 외성은 함락되어 폐허가 되었고, 내성이 晉州城의 최후의 방어막이 되었다. 내성마저 뚫리게 된다면 城 안에 있는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모조리 죽게 된다는 말이다. 朝鮮軍의 병력은 1차 晉州城 전투에 비해 2배나 늘었지만 제각각 병사를 이끌고 온 지휘관의 수가 상당했을 것으로 보아 병력이 많다 하더라도 지휘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朝鮮과 日本의 지휘관의 수는 각각 약 35명과 약 30명으로 10배 가까이 차이 나는 병력에 비해 꽤 많은 수였다, 1차 晉州城 전투 이후 사망한 진주목사 김시민의 뒤를 이어 진주판관이었던 서예원이 진주목사 자리에 서게 된다. 진주목사 서예원은 1차 때에도 참전한 경상우병사 최경회와 충청병사 황진과 함께 晉州城에서 일본군과 대면한다. 

계사년 7월 20일, 1차 때와 마찬가지로 日本의 선제공격이 있었다. 朝鮮은 기다려왔다는 듯이 日本軍을 먼저 제압했고, 日本軍은 잠시 퇴각하였다. 朝鮮軍은 성이 무너질 것을 직감하여 남쪽에 흐르는 남강으로 퇴각로를 만들었다. 日本軍은 晉州城 외부를 10만의 대군으로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기에 朝鮮의 전략 따위는 먹히지 않았다. 7월 21일, 日本軍은 대낮부터 거센 공격을 쳐 부었다. 낮에 3번, 밤에만 4번은 공격하며 晉州城의 희망을 시들게 만들었다. 7월 22일, 日本軍은 晉州城의 동문 앞에 토산을 쌓아 성 내부에 마구잡이로 총탄을 쏟아 부었다. 이에 朝鮮軍도 질세라 충청병사 황진도 내성에 토산을 쌓아 하루에 수차례 공격하는 日本軍에게 반격을 하며 朝鮮의 면목을 보여주었다. 7월 24일, 日本은 朝鮮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화전공격을 통해 성 내부의 초옥들을 불태웠다. 이 날 초유사 김성일은 병사한다. 이 날에도 日本은 불만 지른 것이 아니라 수차례 성 내부에 탄환과 화살을 퍼부으며 朝鮮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7월 25일, 日本은 晉州城 동문 뿐 만이 아니라 서문 쪽에도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여러 개 쌓으며 城 내부를 조준하여 朝鮮인들에게 사격을 퍼붓는다. 이 공격으로 晉州城 내부의 군사들은 약 300명 이상이 숨을 거두었으며 日本의 공격은 더욱 강해져갔다. 日本은 이 기세를 이어 성문을 뚫으려 철갑을 둘은 귀갑차까지 앞세워 晉州城을 밤낮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晉州城의 김해부사 이종인은 백성들을 이끌고 기름과 횃불을 이용해 연신 日本軍을 내쫒았다. 7월 26일, 상당한 日本軍의 수에 견디지 못한 충청병사 황진은 밤낮으로 탄을 쏘아대는 日本軍의 탄환에 맞아 전사한다. 1차에 이어 2차에도 晉州城의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朝鮮 관군 장교 황진의 죽음은 조선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7월 27일, 전날 황진의 죽음으로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朝鮮軍은 끝까지 온 힘을 다해 晉州城을 지켰다. 日本軍은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선군의 항복을 받기위해 탄을 계속해서 쏟아 부었고, 그 탄에 관군들은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진주성의 희망의 불씨는 완전히 꺼져버린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朝鮮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리는 폭우로 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