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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활동

 

6월 Essay etc

Introduction

1.연구의 목적

우리 민족의 아주 강한 독립정신을 보여주는 너무나도 끔찍했던 제암리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독립에 대한 important한 내용을 담고있는 본 Essay를 써야하는 이유는 이 Essay를 씀으로 인하여 많은 피와 눈물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광복인지 알 수 있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의 소중함과 우 리나라의 광복을 위하여 노력하신 분들의 노력에 대한 감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본 Essay를 쓰는 것이다.

2.연구의 목적과 방법

제암리 학살 사건의 내용을 담은 본 Essay Introduction부터 총 4페이지로 구성 Comparison되어있고 본 Essay internet book을 참고하여 썼다 본 Essay를 보면 제암리 학살 사건이 어떻게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알 수 있고 그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의 대해 왜곡된 사실들의 대해서 알 수 있다 특히 제암리 감리교회 문 은폐의 대한 왜곡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Essay는 제암리 학살 사건의 발단부터 제암리 학살 사건의 결과의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본 Essay를 보면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는 어떻게 되었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일제에게 학살 당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의 증언도 남아있고 책도 나왔기 때문에 얼마나 심각했는지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I.       제암리 학살사건 시작의 배경……………….……2

제암리 학살사건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the Korean japanese rule인데 학살 사건 시작의 발단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였는데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제암리를 비롯한 주변의 주민들까지 약 1000여 명이 장날을 이용해서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그날 이후 주민들이 밤마다 뒷산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1919 3 1일에 발안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어떻게 진행 되었냐면 장터에서 유학자인 이정근이라는 사람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걸 모여있는 1000여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 process에서 일본 경찰의 사격이 시작 됬다 그리고 같이 시위를 준비하던 시위대는 주변의 일본인이 다니는 소학교에 불을 질러서 학교를 태워버렸다 이때 흥분해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시위를 하던 군중들이 일본인들이 사는 집 그리고 학교들에 불을 지르고 파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흥분한 시위 군중들이 일본인의 가옥이나 학교건물에 파손을 시키고 불을 질러버리는 바람에 여러 명의 일본인들이 마을 밖으로 대피를 하는 그런 상황까지 만들어졌다 이 시위로 인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칼에 찔려 죽은 사람도 있었고 일본군 수비대에게 붙잡혀서 고문 torture을 받고 풀려난 시위 주동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시위 주동자들은 모두 제암리 감리교회에 관련된 사람들이고 모두 종교 religion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 사건이 진짜 발발하게 된 것은 4 1일부터인데 4 1일부터 4 4 15일까지 진행되고 많은 피해와 부상자들 사망자들이 나오고서야 제암리 학살 사건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단 4 1일 마을 주민들이 주변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는데 4 2일 뭔가 눈치를 챈 일본이 검거반을 보내어서 1차 검거를 시작하였다 이 제 1차 검거계획은 4 6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이 검거반은 헌병과 보병 그리고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 이라고 한다 제 1차 검거는 시위의 원인이 된 한 마을에 습격하여 불을 지르고 시위를 일으킨 주모자들을 찾아내었다 일본의 계획이 뭐였냐면 시위의 주모자들을 모두 찾아내는 것이었고 또 다시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4 3일 전도사와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일본의 각 면사무소를 부시고 순사였던 가와바타를 처단하고 화수리 주재소라는 주재소가 있는데 여기서 주재소는 일제강점기 the Korean japanese rule에 순사(일제강점기에 경찰 중에 가장 계급이 낮은 걸 말하는데 지금의 순경이라고 알고있으면 된다)가 일을 맡아보던 하나의 기관 agency이었다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다  4 3일에 시위 주모자들만 모인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 2000명 여명도 모여서 같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2일 후인 4 5일에 새벽 3시쯤에 일본의 검거반이 수촌리라는 마을을 갑자기 습격하여서 민가는 물론 종교 시설에 불을 질러서 이 사건을 수촌리 학살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4 9일부터 16일까지 일본의 검거반이 또 제 2차 검거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 4 9일에 시작되어서 16일까지 진행되었다 4 13일 아리타라는 육군이 있는데 아직 제암리에 시위 주모자들이 남아있음을 알고 불안함을 느껴서 제암리를 토벌(무력으로 쳐서 없애는 것)할 계획 plan을 새우는데 그때 당시 제암리는 교육이 꽤 잘 되있는 마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2일이 지난 4 15일에 오후 2시경 육군인 아리타가 자신의 부하들 11명을 데리고 일본인 순사 한 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조희창이라는 사람을 데리고 사사카라는 정미소(쌀 찧는 일을 하는 곳)의 주인을 데리고 제암리로 향해서 떠났다 이 사건의 진행 과정은 이렇게 되는데 제암리 주민 가운데에서 성인남자(15세 이상)들을 제암리 감리교회로 모이게 하였는데 어떻게 말하고 모이게 했냐면 전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우리가 진압하면서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해서 사과를 하려고 왔다이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을 교회로 모을 때는 이미 명단을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제암리 감리 교회에 찾아오지 않은 사람들까지 데려오는데 그러고 제암리 감리 교회의 성인남자 15세 이상을 모두 모이게 한 뒤에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외친 말은 사격이었다 그리고는 무차별 사격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을 교회 안에 모아놓고 사격을 하기 전에 교회 문을 전부 폐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교회 문과 창문을 통해서 빠져나온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봐서는 폐쇄까지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사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에 교회를 삥 둘러서 포위하고 있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서 안으로 사격하였다 그리고 사격이 끝나자마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는 불을 질러버렸다 근데 하필이면 이때 바람이 세게 불었기 때문에 교회 아래쪽의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은 군인들이 다니면서 방화를 하였다고 한다 이 상황 때 도망친 사람들이 있는데 도망치다가 잡혀서 총살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도망갔는데 다행히 잡히지 않아서 운이 좋게 목숨을 건진 사람 몇 명도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계획 아래에서 진행된 일제의 이런 끔찍한 만행은 스코필드 박사라는 (석호필) 사람이 현장을 찾아가던 중에 제암리 학살 사건 이후에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을 보고서는 국제사회에 알려주었다 참 다행이다 만약 알려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제암리 학살 사건을 겪고서 마을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해졌을까?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멘탈이 제정신이 아니지 않았을까? 가족을 잃었고 아직도 일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말 슬프고 분하고 황당하고 억울할 거 같다 그리고 일제는 자신들의 마구잡이 사살 사건을 숨기려고 교회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고서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발뻄을 하였고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I.    학살 사건의 대한 피해……………………………..3

 

III.    1. 화염 속의 제암리…………………………….........3

 학살사건의 대한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교회 인근의 집들은 모두 불타버렸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있고  한 덩어리로 뭉친 채 20여 개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하였고 시위를 진행하면서 일제가 막을 때 사살된 주민만 몇 십명의 달한다 잡힌 사람들은 온갖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게 되었고 이런 일제의 행동 때문에 원래는 공격적인 시위가 전혀 아니지만 일본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파손을 시키고 급기야 일본 순사를 죽이기까지 하는 공격적인 시위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일제의 눈엣가시가 되어버린 화성은 일제의 치밀한 계획 아래에 그런 처참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심지어 살아남은 주민들의 증언까지 남아있다 일본군이 마구잡이 사살을 하고서는 교회를 불태운 이유는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증거를 인멸하려고 그런 것이다 처참히 학살당한 주민만 23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제가 집집마다 불을 질렀는데 그렇게 평화롭고 행복했던 제암리는 화염 속의 마을로 변해버렸다 생존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나고 2일째까지도 제암리 마을의 30리 밖까지 불에 탄 재들이 날아가고 탄 내가 났다고 한다

 

2. 제암리 피해의 대한 일제의 말은 …………3

 이 사건이 일어나고 3일 뒤에 캐나다의 선교사인 스코필드가 도착해서 학살 사건이 일어난 후의 마을의 모습은 찍어서 일제의 끔찍한 만행을 세상에 알렸는데 알려지고 나서 일본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때 일제가 하는 말이 반항하는 기세가 보이길래 사격을 했는데 혼란 중에서 서쪽 집에 불이 났고 바람이 불어서 그 바람을 타고 제암리 감리 교회에 옮겨 붙었다였다 진짜 뻔뻔하다고 생각된다 사과라도 했으면 욕을 덜 먹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결국 일제의 말은 이 학살 사건은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안 되는게 특별 검거반이 나와서 검거를 하고 검거반이 4 15일에 갑자기 제암리 마을에 습격을 하지를 않나 모두 일제의 계획 아래에 진행된 사건인데 이게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라니 말이 안 된다 생존 주민 중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이 교회 안팎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지르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불을 질렀다라고 말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이 학살 사건은 치밀하게 계획된 만행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군이 교회와 위쪽 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평화로웠던 화성시의 위치한 제암리 마을은 화염 속에 휩싸인 마을이 되어버린 셈이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창으로 찌르고 시체를 토막 냈다고 한다 일제에게 처참히 학살 당한 주민들만 수십 명인데 여기서 웃기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다음 페이지에 나올 내용이다 그리고 일제는 제암리의 가옥 중 30여 채의 가옥을 불태웠고 제암리 학살 사건을 벌이고 나서 옆 동네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 신자 6명을 살해하고 역시나 전처럼 그 시체 6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유는 증거인멸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증거를 왜 없애려고 했냐 하면 자신들의 만행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픈 역사를 우리 민족은 꼭 기억해야 하는데1919 4 15일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히 학살을 당해야 했던 대단한 우리 선조들의 대해서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내가 1919년에 살아있었다면 독립운동가들처럼 계속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마 무서워서 못했을 것 같다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3.학살 사건 주동자인 아리타의 최후는………...4

제암리 학살 사건의 주동자였던 아리타 중위는 명령 오해로 기록되고 판사의 이름이 생략된 재판을 거쳐서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않은 그는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82년에 발견된 20여 개의 유해들은 사건이 발생한 지 63년만에 발굴되어서 재건된 제암리 감리 교회 뒷동산에 있다고 한다 아리타 중위는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거짓 재판 하나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되어버렸고 그 큰 죄는 한순간의 잘못된 재판에 죄를 치르지 않은 채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아리타 중위는 자신의 이런 만행에 한번이라도 죄책감을 가졌을까 제암리 주민들에게 사과를 계속해도 모자랄 판에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고 무죄 판결을 받고 살아갔다는 사실이 정말로 참혹하다 제암리 주민들은 처참히 학살되어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집을 잃고 평화로웠던 마을까지 모두 잃어버렸는데 말이다 이 상황에서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무죄 판결까지 받았다니 제암리 마을 사람들은 정말 억울할 것 같다 왜냐하면 원래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그냥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 뿐인데 엄청난 억제를 받고 고문까지 받으니 말이다 그때 당시의 제암리 학살 사건의 생존 주민들은 영원히 이 일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워낙 충격적이었고 갑작스럽게 억울하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근데 지금까지도 일본사람들은 제암리 학살 사건의 대한 자기 선조들의 잘못의 대해서 한번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는게 더 충격적이다 보복에 눈이 먼 인간적이지 않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늦은 지금이라도 사과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 제암리 학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한 아주 심각한 사건인데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게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I.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외곡된 진실…………4

   

1.    은폐와 왜곡 그리고 사건의 대한 진실………..4

제암리 학살 사건의 대한 진실과 왜곡된 사실들의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인데 일단 왜곡된 사실에는 교회 문 못질설과 우발사건설이 있는데 먼저 교회 문 못질설의 대해서 설명하자면 제암리 감리교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해놓고 무차별 사격을 하기 전에 원래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만약의 상황을 고려해서 문을 잠그고 시작하는데 교회 안에서 빠져 나온 사람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근데 생각해보면 꼭 문으로 탈출할 거라는 보장은 없고 아무도 몰랐던 비밀문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문은 잠그고 총질을 한거 같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본군이 당시에 다른 문이 있었는데 까먹고 안 잠그고 총질을 시작했을 거라는 말도 말이 된다 여기까지는 이 교회 문 못질설의 대한 이야기였고 더 중요한 우발사건설의 대해서 이야기 해볼 차례이다 일본은 물론이고 일본인 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살아남은 제암리 생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분명히 치밀하게 계획된 만행인데 일본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집단으로 반항하는 기세가 보이길래 사격을 한 것 뿐인데 갑자기 혼란 중에 서쪽의 집에서 불이 났고 혼란 중에 서쪽 집에서 난 불이 바람이 부는 바람에 바람을 타고 제암리 감리 교회에 옮겨 붙었다 그래서 이 제암리 학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만행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데 인정을 안하는 이유가 뭐냐면 이걸 맞다고 주장하는 순간 자신들이 저지른 행동의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책임을 지는 순간 자신들의 권력도 평소에 누리고 있었던 것들도 모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불타버렸던 제암리 교회는 2000년도 전에 복원시켰기 때문에 화성시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한다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예전 모습을 볼 수 없다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이 일어난 3일 후에 제암리 마을에 찾아온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끌 수 없는 불꽃>이라는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전세계의 알렸다 영원히 숨겨질 뻔한 이 사건을 알리는데 큰 도움을 준 것 이다

 

 

 

 

 

I.       Conclusion

일본이 위안부나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사과를 안하는 것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순간 이 사건의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속 되는 희생에도 반드시 나라를 되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독립운동가들과 선조들 덕분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일본에게 식민지 취급을 당했을 때 편하게 가만히 있어도 됐었는데 말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작이 비록 일본의 잘못만 있다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하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약하기도 했었고 그리 강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에 포함된다 일제 강점기에 선조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지금 이 결과가 이런 system이 나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이 와도 선조들처럼 이겨낼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