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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일기 (조민주 에세이) etc

I.         序論

 

 

          1. 연구의 목적

   Essay는 朝鮮에서 처음으로 廢位 당한 暴君으로 알려진 燕山君에 대한 내용이다. 조선의 暴君이라 알려져 있는 燕山君은 사실 卽位 초반에는 나라를 위해 努力하는 聖君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오직 暴君으로만 알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卽位 4年 동안 꽤나 많은 일을 이루었고 당시 平和로운 나라였다. 歷史를 誇張하고 의로운 內容을 없애며 그를 暴君으로 記憶하게 만들었다. 事實 燕山君은 어릴 때부터 父母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해 亂暴스러운 氣質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다. 燕山君의 어머니 廢妃 尹氏의 嫉妬가 많아서였을까 成宗이 女子를 좋아하여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尹氏와 成宗 모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Essay의 연구 방법은 자료 조사, 즉 책과 internet을 참조하여 내용을 다루었고 internet보다는 책의 내용을 많이 사용하여 작성하였다. 범위는 成宗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中宗의 죽음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本論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첫 번째 장에서는 廢位가 당하는 尹 氏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번째 장에서는 燕山君이 卽位하여 4年 동안 이루는 業績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 번째 장에서는 朝鮮의 첫 번째 士禍, 戊午士禍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戊午士禍 이후 暴君이 된 燕山君의 모습도 담아내고 있다. 네 번째 장에서는 朝鮮의 두 번째 士禍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은 甲子士禍에 대해 다루고 있다. 끔직한 刑罰에 대해 나오기도 하고 그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 장에서는 中宗 反正으로 인해 燕山君이 廢位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邪侈를 부리고 술과 女子를 좋아하며 百姓들을 돌보지 않은 燕山君의 最後이다. 結論에서는 中宗이 卽位를 한 후의 朝鮮의 狀況과 中宗이 겪은 己卯士禍에 대해 다룬다. 그 후의 朝鮮의 狀況과 中宗의 죽음을 다룬다. 또 燕山君이 暴君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 한 後 본 Essay는 마무리된다.

 

 

II.                 제헌 왕후

 

 

          1, 齊憲王后 卽位

齊憲 王后, 廢妃 尹氏의 卽位 課程을 알기 前에 먼저 成宗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成宗은 德宗, 懿敬世子 李暲 李暲과 昭惠王后 한 씨에게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德宗은 世祖의 아들로 世子에 책봉되었지만, 20살의 나이로 死亡하였다. 어릴 때부터 健康이 좋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病勢가 惡貨되어 死亡하였다고 한다. 世祖의 둘째 아들은 睿宗으로 睿宗조차 王位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死亡하였다. 睿宗의 첫째 부인과 아들은 死亡하였고 둘째 아들을 寶位에 앉히려고 하였으나 너무 어린 탓에 자을산군, 즉 德宗의 아들인 成宗이 王位에 오른다. 하지만 成宗의 나이도 13살이었으므로 할머니인 貞熹 王后 尹氏가 垂簾 昭惠王后 을 한다. 成宗은 恭惠 王后 韓 氏와 結婚하였는데 그녀가 19세의 나이로 後事 없이 死亡하였다. 그러자 王室의 大王 大妃였던 貞熹 王后, 安順 王后, 昭惠 王后 中 貞熹 王后가 淑儀 尹氏를 王妃로 맞을 것을 요구하자 1476711日 제헌王后가 卽位하였다. 王妃로 卽位한 齊憲王后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던 狀態였다. 그해 14761123日 齊憲王后는 燕山君을 출산하였다.

 

          2. 齊憲王后 廢位

成宗은 齊憲王后 외에도 妾을 거느리고 있었다. 成宗의 衙內는 8명이고 子女는 14 11녀로 燕山君은 成宗의 맏아들이다. 齊憲王后는 嫉妬가 많았다고 알려진다. 成宗의 後宮들에게 좋지 않은 行動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成宗에게도 禮儀 바르지 못한 行實을 계속하자 왕의 발걸음은 끊기게 되었다. 그러다 齊憲王后의 廢位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연산군이 태어나고 1年 뒤 즈음이었다. 1477年 齊憲王后가 後宮들을 죽이게 되면 自身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 같아 그의 妾들을 죽이기 위해 숨겨둔 勒約인 砒霜이 발각되어 重典에서 비가 될 뻔하였지만 元子의 親母라는 이유로 위기를 피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齊憲王后는 음식상을 뒤엎거나 원자가 아프면 自身에게로 아들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부러 상한 젖을 보내기도 하는 行實이 계속 되었고 그녀가 폐위 되는 이유의 事件이 發生한다. 1479年 齊憲王后는 成宗의 閨房 出入이 잦아졌다는 이유로 직접 그를 찾아가 自身을 멀리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 과정에서 齊憲王后와 성종 사이의 실랑이가 이루어지면서 齊憲王后가 成宗의 뺨에 손톱자국을 낸다. 당시 朝鮮時代에는 儒敎 社會가 박혀 있었는데 夫人이 男便을, 그것도 왕의 얼굴에 傷處를 냈다는 것은 엄청난 事件이었다. 이 事件으로 成宗과 그의 大王 大妃들이 激忿을 내자 廢位가 될 危險에 처한다. 大臣들은 元子의 親母이므로 廢位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戒屬 主張하였지만 成宗과 大妃들의 立場은 바뀌지 않을 것 같았다. 結局 齊憲 王后1479 6 2日 廢庶人이 되었고 그녀는 親定에 앉혀 살게 된다.

 

3. 廢妃 尹氏 賜死 事件

以後 1479 11月에는 淑儀 氏를 貞顯王后로 卽位시켰고 齊憲王后는 이 狀況까지 이르자 自身의 行動에 대해 反省하게 되었다. 1482年 一部 大臣들은 世子의 어머니를 一般 百姓처럼 지내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主張을 하였고 朝廷에서는 廢妃 尹氏의 去處에 대해 論意하게 된다. 이에 成宗은 廢妃 尹氏의 風采를 알아보고 오라는 命令을 하였다. 이 消息을 들은 仁粹大妃는 몇몇 內人들과 內侍들에게 名을 하였고 그 名을 받은 臣下들은 成宗에게 尹氏가 전혀 反省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虛僞 事實을 報告 하였다. 成宗은 이 말을 듣고 大臣들과 論意를 하여 廢妃 尹氏 1482 8 16日 賜藥을 받고 賜死된다. 그 後 英祖는 100年 동안 廢妃 尹氏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命令하였다. 이 理由로 燕山君은 自身의 親母가 賜死되었다는 것도 모른 체 살아 왔던 것이다.

 

 

III.     燕山君 卽位

 

 

             1. 燕山君 卽位 前

尹氏가 廢位 당하던 當時 燕山君은 네 살이었고 尹氏가 事件 당하던 當時에는 燕山君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 그 後 成宗의 名으로 100년동안 廢妃 尹氏에 대해 論意 하지 말라 成宗이 名을 내렸기 때문에 연산군은 貞顯 王后 尹氏를 친어머니인줄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정현 王后도 廢妃의 아들에게는 큰 사랑을 주지 못 하였고 할머니 仁粹大妃 역시 燕山君에게 酷毒하게 대하였다. 하지만 仁粹大妃가 後에 태어난 貞顯 王后의 아들 晉城大君 (中宗) 에게는 다정한 態度를 보이자 燕山君은 이 모습에 대한 傷處를 받는다. 이런 錯雜한 狀況에서 燕山君이 잘 자라지 못 했던 것이 당연하다. 聰明하긴 하였으나 亂暴한 冒襲을 보였고, 學文을 싫어하고 固執스러웠으며 괴팍하고 變德스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晉城大君도 태어나지 않았을 時機여서 成宗의 아들이 燕山君 밖에 없었기 때문에 탐탁치 못하게 여겼어도 1483 8歲였던 燕山君을 世子로 책봉한다. 그는 자라나면서 亂暴한 性格이 나오기 始作했는데 이에 대한 逸話가 있다. 어느 날 成宗이 世子인 융을 불러내 賃金의 道理에 대해 說明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成宗이 아끼던 사슴이 다가와 燕山君의 손등과 옷을 핥자 융은 사슴이 自身의 옷을 핥은 것에 대해 憤怒하여 그 사슴을 걷어찬다. 그 冒襲을 옆에서 지켜본 成宗은 燕山君을 크게 꾸짖었고 이 事件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 燕山君이 王位에 오르자 마자 그 사슴을 죽여 먹었다고 한다. 또 다른 逸話는 그의 스승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스승 중 趙之瑞와 許琛이 있었는데 趙之瑞는 燕山君에게 恒常 잔소리를 하고 꾸짖음을 繼續하였지만 許琛은 燕山君에게 너그럽게 대하였고 어린 燕山君을 自由롭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趙之瑞의 行動에 화가 났는지 燕山君은 王이 된 後 趙之瑞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다.

 

2. 燕山君 卽位 初期

이런 어린 時節을 보내고 1494 12月 成宗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燕山君은 19세의 나이로 王位에 오른다. 燕山君은 士禍가 일어나기 前까지는 暴君이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두 번의 士禍가 일어나기 4年前까지는 國防에 힘쓰고 나라를 다스리려는 冒襲이 보였다. 燕山君은 全國의 모든 도에 暗行御史를 派遣해 百姓들의 冒襲을 살피기도 하였고 朝鮮의 人材를 찾기 위해 별시文科를 實施해 33人을 及第시켰다. 몇몇 文臣들에게 [1]賜暇讀書를 實施하기도 하였다. 世祖 以後 3조의 國朝寶鑑을 編纂하였다. 國防에 대해서는 女眞族의 浸入이 繼續되자 그를 懷柔시켜 安定되도록 努力했다. 倭軍의 侵掠에 大妃해 [2]備戎司를 設置해 兵機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렇게 燕山君의 卽位 初期는 安定的이고 平和로웠다.

 

 

IV.    戊午士禍

 

 

 

1.       弔義帝文

하지만 持難 4동안에도 臣下들이 事事件件 干涉을 하였다. 이에 燕山君과 臣下들의 다툼이 생겨나곤 했다. 그러다 卽位 4 後 燕山君은 士林派 사람들을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던 時機에 勳舊派들이 燕山君을 契機로 士林派를 除去하고자 하였다. 士林派는 成宗 때부터 柳子光, 李克墩, 尹弼商 등의 勳舊派들을 批判 하곤 하였는데 이에 그들은 오래 前부터 士林派를 除去하려 努力하였다. 이 때 李克墩이 發見 한 것이 金宗直의 弔義帝文이다. 實錄 編纂은 왕의 在位 其間 中 사관들이 쓴 承政院日記 등의 資料를 모아 編纂하도록 되어있다. [3]史草에는 士官의 이름이나 官職 등이 기재 되지 않는 것이 原則이었는데 自身에 대한 情報를 넣는다면 後에 報復이나 不利益이 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柳子光은 燕山君에게 上訴를 내렸다. 上訴에는 弔義帝文에 대한 內容이 있었는데 弔義帝文은 진나라의 項羽가 초나라의 王 義弟를 暗殺하였다고 主張하는 글이었다. 이렇게 보면 아무 問題 없는 글처럼 보이지만 事實 世祖가 自身의 조카인 斷種을 내쫓고 王位를 차지한 事件을 批判하는 글이었다. 이 弔義帝文은 士林派의 重要한 자리에 앉아 있는 金馹孫의 史草에서 나온 것으로 金宗直이 作成한 글이다. 燕山君은 世祖를 凌蔑한 것에 대해 憤怒하여 金宗直의 弟子들, 士林派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내었다. 이 事件이 1498戊午년에 일어난 戊午士禍이다. 金宗直에게는 [4]剖棺斬屍를 내리고 金馹孫, 이목, 權五福 등 金宗直의 弟子들은 冒頭 拷問을 받고 [5]陵遲處斬형에 처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수 백명이 流配를 당하였다. 戊午士禍는 朝鮮의 4[6]貞顯라고 불리는 事件들 中 첫 번째 事件이다.

 

1.      戊午士禍 이 후 燕山君의 모습

戊午士禍 이 後 燕山君은 朝鮮의 政權을 잡게 되었다. 戊午士禍로 士林派 사람들이 모두 죽자 燕山君에게는 諫臣들 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燕山君은 원래 놀고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自身을 방해하는 大臣들이 없자 아무런 눈치를 보지 않고 邪侈를 부리며 每日 잔치를 열고 全國에서 妓生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놀았다. 處女든 結婚을 한 女子 든 얼굴이 이쁘다면 무조건 데리고 왔다. 만약 男便이 있다고 名을 따르지 않으면 그 男便을 죽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女子들은 燕山君의 妓生이 되어야 했다. 이 때 宮中으로 들어온 妓生들을 興淸이라고 불렸는데 興淸이 亡靑이다 라는 뜻의 興淸亡靑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燕山君은 큰어머니를 强姦 하였는데 아이가 생겨 自殺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燕山君과 興淸들이 놀던 場所는 바로 儒生들이 工夫를 하는 곳인 成均館, 集賢殿, 圓覺寺 등이었다. 燕山君의 興淸들 中 燕山君의 마음을 뺏은 張綠水라는 人物이 있다. 어느 이야기를 들어보면 30대의 나이었지만 얼굴은 15세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張綠水燕山君을 아기처럼 다루었고 또 그것을 즐긴 燕山君이었다. 張綠水로 인해 燕山君은 더욱 더 많은 惡行을 저지르게 되었고 暴政의 核心 人物이라 말 할 수 있다. 이런 放蕩한 生活이 繼續되니 國庫는 텅 비게 되었고 國庫를 채우기 위해 百姓들의 稅金을 올리도록 한다. 또 그마저도 不足하자 臣下들에게도 땅과 奴婢를 내놓으라는 名을 한다. 이에 그 동안 燕山君을 거들던 사람들의 不滿이 생기자 不滿 勢力들을 이용하여 權力을 잡기 위한 人物이 바로 任士洪이다.

 

 

V.      甲子士禍

 

 

             1. 廢妃 尹氏 賜死 事件 폭로

      任士洪은 尹氏 의 親庭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신氏를 自身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親庭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은 廢妃 尹氏 賜死 事件을 燕山君 에게 알린다면 그가 그 일과 關聯된 사람들을 죽일 것이므로 이로써 自身이 權力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任士洪은 中殿 신氏의 오빠인 신수근과 함께 燕山君 이 사사 事件을 알 수 있도록 陰謀를 꾸몄다. 事實 燕山君 은 自身의 어머니가 廢位 되었다는 것도, 쫓겨나 죽음을 맞이 한 것도 알고 있었다. 成宗의 관 속에 같이 넣을 [7] 誌文을 읽다가 확실하게 事實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賜藥을 받고 죽었다는 일은 알지 못하였다. 며칠 뒤 任士洪은 신氏를 燕山君 에게 데려와 모든 事實을 말하게 하였다. 신氏는 그 동안 保管하고 있었던 廢妃 尹氏의 피 묻은 저고리를 꺼내온다. 신氏는 통곡을 하며 말했다. 이 저고리는 尹氏가 賜藥을 마시고 피를 토할 때 입고 있던 것이라며 그 때의 狀況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尹氏의 抑鬱함을 풀어달라고 懇請하였다.

1.      暴君이 된 燕山君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난 燕山君은 제일 먼저 尹氏 廢黜 에 관여한 貴人 嚴氏 와 鄭氏 를 찾아갔다. 貴人 嚴氏 와 鄭氏廢庶人 하고 奴婢財産을 거두어들였으며 그들의 아들, 安陽君鳳安君 을 잡아들였다. 이들을 잡아들인 이유는 잔혹하다. 바로 자식이 어머니를 직접 죽이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燕山君이 몽둥이로 이 罪人들을 치라고 명령하였더니 安陽君은 자신의 어머니인줄 모르고 을 따랐지만 鳳安君은 어머니일 것을 짐작하여 차마 때리지 못하였다. 결국에 두 여인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게 되었고 安陽君鳳安君은 귀양을 보냈다. 두 貴人을 죽이고 나선 仁粹大妃를 찾아갔다. 燕山君은 仁粹大妃에게 우리 어머니를 괴롭힌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지만 仁粹大妃는 담담한 표정으로 燕山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燕山君은 仁粹大妃를 머리로 들이박았고 이에 그 충격으로 한 달 후 죽게 된다. 두 명의 貴人과 仁粹大妃 외에도 尹氏 廢黜 에 찬성한 사람들을 하나 하나 찾아내기 시작하였다. 廢位 에 대해 주요 논의 한 인물 중 韓明澮 와 韓致亨, 鄭汝昌 등은 이미 죽어 剖棺斬屍 당하였고 尹弼商, 成俊, 李克均 등은 處刑 당하였으며 여러 사람들을 귀양 보내고 奴婢로 삼거나 剖棺斬屍로도 모자라 [8] 碎骨飄風을 행하기도 한다. 罪人들은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그들의 먼 친척들에게도 벌을 주어 수 백 명이 죽었다. 甲子年 1504 3月부터 10月까지 7個月간 벌어진 事件을 甲子士禍라고 하며 朝鮮 4大 士禍 中 두 번째 士禍이다.

 

 

II.       中宗 反正

 

 

-     燕山君의 폐위와 죽음

   甲子士禍 이후 더 큰 權力을 얻게 되었고 그를 막는 臣下들은 모두 流配 보내거나 죽였으며 戊午士禍 以後, 甲子士禍 前과 같이. 興淸들과 놀고 먹고 마시는 生活이 繼續되었다. 政治 論爭을 없애기 위해 經筵을 없애고 成均館을 놀이 場所로 만들었다. 연산군은 陶成 밖 30리의 民家를 撤去해 사냥터로 만들었고 憤怒한 百姓들은 왕의 行實을 非難하는 한글 投書들을 만들었다. 이에 연산군은 訓民正音 使用을 禁止하였고 한글 關係 書籍을 태우는 등 歷史를 지우는 行動을 하기도 하였다. 또 전국에 採紅駿使를 보내어 美女를 뽑아오게 하는 등 음란한 짓은 끝나지 않았다. 이마저도 모자라 燕山君은 자신의 큰아버지인 月山大君의 박씨 부인을 욕보여 박씨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事件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 朴元宗은 國家와 百姓을 돌보지 않는 것과 누님의 복수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던 그는 吏曹參判 成希顔, 吏曹判書 柳順汀, 武臣 張珽, 朴永文, 宮闕 수비대의 지휘관 辛允武 등과 함께 擧事를 치렀다. 예정 擧事日은 1506 9 2日이었다. 9 2日 연산군이 殘置를 하러 나들이를 가는데 殘置가 끝나고 나서 王을 가둘 計劃을 세우고 있었다. 이 때 귀양살이를 하던 柳濱李顆 등이 居士를 알리는 檄文을 보내왔다. 이에 놀란 成希顔과 朴元宗 등은 居士 日을 앞당기자고 主張하였다. 그 理由는 그들이 먼저 居士를 일으키면 兵力이 많아져 居士를 이루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9 1日 밤 豫定대로 居士를 進行하였고 完璧한 勝利를 거두었다. 朴元宗이 軍隊를 일으키자 反正군들도 일어났다. 朴元宗의 軍隊가 宮闕을 향해 달려가자 辛允武가 宮闕의 門을 열고 大闕로 쳐들어갔다. 이 때 尙宮은 反亂이 일어났다고 王妃에게 알렸고 王妃는 王에게 反亂 事實을 알리려 갔지만 燕山君은 그 것을 믿지 않아 자리를 피하지 않았고 結局 朴元宗에게 玉碎를 내놓게 되었다. 燕山君은 廢位 당하고 다시 王子 身分이 되었다. 그 後 諫臣 任士洪의 목을 베었고 燕山君의 妻男들을 죽였다. 愼氏와 그의 아들 世子도 廢位 되었고 燕山君의 女子 張綠水는 百姓들에게 돌을 맞아 죽게 되었다고 한다.. 燕山君은 江華島로 流配를 간지 두 달 만에 病에 걸려 1506 11 31세의 나이로 죽게 되었다.

 

 

VII.   結論

 

 

1. 中宗 卽位

   中宗 反正으로 인해 卽位한 晉城大君燕山君의 異腹동생이었으며 成宗과 정현왕후 尹氏 사이에서 태어난 첫 째 아들이었다. 中宗의 王妃는 端敬王后 신氏로 신수근의 딸이었으며 신수근은 연산군의 次男이었다. 그녀는 罪人의 子息이었기 때문에 廢位 당하고 만다. 신氏와 中宗의 관련된 치마바위 이야기가 있다. 中宗은 신氏를 사랑하였지만 신氏가 廢位 당하자 그녀를 그리워하던 中宗은 繼續 그녀의 親庭 쪽을 바라보았고 그 것을 안 신氏는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 뒤 章敬王后 尹氏가 卽位하고 元子 (仁宗)을 낳았다. 中宗은 1506 9月에 卽位하였으며 革命으로 推戴된 王인 만큼 王權이 약했고 朝廷의 權力은 公信들이 쥐고 있었다. 中宗은 權力을 얻기 위하여 努力하였다. 趙光祖를 곁에 두어 改革을 시도하고자 하였으나 趙光祖의 改革 방식은 이상주의적이었고 서둘렀기 때문에 勳舊派의 반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趙光祖의 권력이 세져 불안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南袞, 沈貞, 洪景舟 등의 勳舊派들이 모함으로 인해 己卯士禍가 일어났다. 勳舊派들은 洪景舟의 딸의 中宗의 妾인 것을 이용하였는데 나뭇잎에 꿀을 走肖爲王 글자로 발라 놓은 뒤 나중에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었고 그 글씨가 나타나자 洪景舟의 딸이 그것을 들고 中宗에게 알리러 간 것이다. 走肖爲王를 합치면 가 되고 爲王, 씨가 곧 이 된다는 뜻이었다. 이 사실은 곧 叛逆이었기 때문에 趙光祖를 귀양 보내었고 한달 후 賜死 되었다. 그 後 外戚 勢力 등이 등장함으로써 卽位 中期와 後半에는 葛藤이 심해져 나라가 便安한 날이 없었다. 이를 노려 倭寇도 侵略하고 혼란스러운 狀況이 繼續된다.  38年이라는 期間 동안 中宗은 뛰어난 業績을 남기지 못하고 1543 3月부터 世子가 代理淸淨을 하다가 11月 王位를 넘겨주었고 그 다음날인 1544 11 29 57세의 나이로 昇遐하였다.

 

2. 燕山君은 과연 暴君인가

   燕山君은 暴君이다.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女子를 强姦 시켰다. 술과 女子를 좋아했고 國庫가 바닥 날 만큼 놀고 먹기를 반복하였다. 百姓들을 돌보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臣下들을 모조리 죽여 諫臣들만 남은 狀況에서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나가겠는가. 그가 暴君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부터 性格이 亂暴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大妃의 驅迫을 받고 사랑은 받지 못했던 燕山君이었다. 燕山君은 이 狀況을 이겨내지 못하였고 걱정거리,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연산군은 廢妃 尹氏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成宗의 名 때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廢位 당하던 것도 스스로 알아내었기에 어머니의 한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事實 어머니가 廢位 당해 病으로 죽거나 나이가 들어 죽었다면 어떠한 화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賜藥을 마시고 賜死되었다는 것을 안 後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한과 어머니의 抑鬱함을 알았기에 그것이 한번에 暴發하여 關聯된 사람들을 모두 죽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後 연산군의 고삐가 풀려 마음대로 行動하고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놀고 邪侈를 부렸다. 事實 연산군은 自身이 廢位 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王이 나랏일을 하지 않아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이것을 改革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廢位 당한 後 마음의 病이 생겨 신체에도 病이 생기게 된 것 같다. 燕山君은 어머니의 事件이 없었다면 朝鮮의 聖君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점이 안타까울 뿐이고 燕山君의 모든 事件들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갔으면 하였기 때문에 이 Essay를 작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 사가독서란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정책

[2] 비융사란 철갑옷이나 투구 등을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조선시대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