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avigate_next  학교생활  navigate_next  교과활동

교과활동

 

Essay -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민주, 서하) etc

Introduction


연구의 목적
본 Essay에는 高麗와 朝鮮의 boundaryline에 위치한 era인 高麗의 滅亡부터 朝鮮의 建國까지의 story를 담고 있다. 朝鮮의 建國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사람들과 incident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history 중에서 important 사건이기 때문에 본 Essay에서 高麗의 滅亡과 朝鮮의 建國에 대해 다루어 보겠다.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Essay는 internet과 book을 참조하여 작성하였고 高麗 후기인 禑王 떄의 威化島回軍 朝鮮 建國 후의 제 2차 王子─亂까지의 story를 담고 있다. 본론은 총 2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본론의 첫 번째 장에서는 외부의 침략 등으로 혼란스러워진 高麗 후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또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회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세력의 모습, 또 그 勢力이 일으킨 叛逆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론의 두 번째 장에서는 高麗가 흔들리며 朝鮮 이 建國되려는 과정에 대해 담고 있다. 본론의 세 번째 장에서는 그 유명한 丹心歌와 何如歌의 내용, 朝鮮이 본격적으로 세워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또 朝鮮의 建國 후 일어난 몇 가지 문제들을 알아보았다. 두 차례의 王子─亂 을 거치고 나서 conclusion에서는 태종 太宗의 정치에 대해 다루었다.


高麗


高麗 의 위기
高麗 말에 왜구 倭寇 와 홍건적 紅巾賊 (Chinese 中國 지역의 원 元나라 1351년에 일어난 도적 thief의 무리 bevy이다. Bevy의 name이 紅巾賊인 reason는 머리에 red towel을 둘렀다고 하여서 紅巾賊이라는 name이 붙어졌다. 홍두적, 홍적이라고도 부른다. 두 차례에 걸쳐 高麗를 invasion 하였는데 1359년에 첫 번째로 高麗에 침략invasion 하였고
1361년 10월에 10만명의 紅巾賊을 이끌어 두 번째 invasion을 하였다.) 의 高麗 invasion은 1359년부터 1361년까지 계속되었다.

高麗 말기의 새로운 勢力
紅巾賊의 침략 invasion이 잦아졌는데 이때 정권을 잡고 있었던 崔瑩과 李成桂가 있었다. 이들이 바로 신흥무인세력 新興無人勢力이다. 新興無人勢力과 신진사대부 新進士大夫가 함께 권력을 키워나가면서 하나의 勢力으로 합친다. 합해진 이 두 勢力은 개혁파 改革派로 高麗 의 사회 제도를 바꾸고 개혁을 주장하고 도모하는 무리였다. 하나의 세력 勢力을 만들었지만 서로의 의견이 달라서 두 개의 파派로 나뉘게 되는데 온건파 穩健派와 급진파 穩健派이다. 穩健派의 대표 주자는 정몽주 鄭夢周이고 急進派의 대표 주자는 정도전 鄭道傳이다. 穩健派의 뜻은 행동이 과격하지 않은 派라는 뜻이고 急進派의 뜻은 빨리 하는 것을 주장하는 派이다.

威化島回軍
中國 지역에는 明이 元을 멸망시키고 中國의 통일 왕조가 되었다. 1388년 2월 원을 몰아낸 明이 과거 元의 쌍성총관부 雙城摠管府가 있던 철령 鐵嶺 (현재의 함경도 咸鏡道와 강원도 江原道 boundary에 속해 있는 고개) north ground의 propert가 되어야 한다고 高麗 에게 주장하며 ground 반환을 요구 demand해왔다.
하지만 高麗는 明의 demand를 받아들이지 않고 당시 權力을 잡고 있던 崔瑩을 중심으로 遼東半島 (현재 中國의 랴오둥 반도) 를 공격해 高麗의 땅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거세졌다. 禑王은 崔瑩을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 八道 都統使로 삼고, 조민수 曺敏修를 좌군도통사 左軍都統使, 이성계 李成桂를 우군도통사 右軍都統使로 삼았다.
曺敏修와 李成桂는 1388년 5월 위화도 威化島에 도착한 후 禑王에게 四不可論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 attack하는 것은 불가 不可하다.  2. 여름철 summer season에 military를 동원 mobilize하는 것은 不可하다. 3. 明을 attack하는 틈을 타서 north에서 왜구 Japanese invaders가 침범 invasion할 것이다. 4. 장마철 rainy season이기 때문에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 weapon로 쓸 수 없고 병사들 soldiers도 전염병 infectious disease에 걸릴 수가 있다.) 을 주장하며 개경 開京으로 군사 military를 돌렸다. 李成桂와 曺敏修의 5만 military는 開京을 attack 하였다. 遼東半島 attack에 거의 모든 military를 지원support하였기 때문에 禑王과 崔瑩은 패할 수 밖에 없었다.
李成桂는 禑王을 폐위 dethronement시켜 강화도 江華島로 보내고, 崔瑩은 고봉현 高烽縣으로 유배시켰다. 이 정변 政變을 위화도 회군 威化島回軍이라고 하며 高麗의 왕권 王權을 장악한 반역 叛逆사건이다..


朝鮮


高麗 滅亡과 朝鮮 建國
威化島 回軍 이후 勸力을 잡은 李成桂는 崔瑩과 禑王의 유배 지역을 강원도 강릉으로 옮긴 후 죽이고 1388년 6월 昌王을 옹립하였다. 이후 搖動 征伐 계획을 철회하고 土地 改革을 실시하였다. 이는 百姓들의 지지를 李成桂를 비롯한 急進派 勢力에게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昌王은 왕씨가 아니라 신씨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폐위당하고 李成桂의 의해 강화도에서 죽었다.
朝鮮 建國의 核心은 佛敎를 믿지 않는 유교의 國家, 王恩 재상을 任命하는 임명권만을 가지고 정치는 재상이 이끄는 재상 總裁제였다. 李成桂의 최측근인 정도전 鄭道傳은 새로운 나라에서 실시할 재상 總裁제의 첫 번째 재상으로 자신의 사형인 鄭夢周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였으나, 鄭夢周는 “유학을 중시하는 유자가 충을 어기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는가?”라며 거부한다. 이 때문에 朝鮮 建國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李成桂의 5번째 아들인 李芳遠이 아버지인 李成桂와 鄭道傳의 許諾을 받지 않고 獨善的으로 鄭夢周를 說得하려 하지만 역시 說得이 되지 않았다. 이 때 李芳遠의 何如歌 鄭夢周의 丹心歌라는 시를 서로 나누었다.
李芳遠은 결국 鄭道傳을 善竹橋에서 暗殺하고 만다. 이로 인해서 李芳遠은 鄭道傳과 李成桂의 신뢰를 크게 잃게 된다. 마지막 버팀목이던 鄭夢周를 죽이고 난 후에는 다른 穩健派 勢力은 빠르게 흩어졌고 朝鮮의 建國은 매우 빠른 속도로 進行되게 되었다. 1392年 마침내 李成桂와 그 가문 그리고 鄭道傳과 몇몇 新進士大夫에 의해서 朝鮮 이 建國되었다.

公信 冊封
하지만 다른 문제가 發生하게 되었는데, 이는 바로 公信 冊封 문제였다. 李芳遠에게 신뢰를 잃은 李成桂와 鄭道傳은 이방원 李芳遠의 勢力이 더 강해져 미칠 영향을 염려해 李芳遠과 그 一派들을 공신의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李芳遠은 이 때문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李成桂가 정정했기에 별다른 힘은 써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鄭道傳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王族의 정치 參與 금지, 王族과 貴族 勢力의 사병 革罷를 계속 주장했다. 그러던 1399년 마침내 李成桂의 입에서 세자 책봉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原則에 의하면 첫째 아들인 이방우 李芳雨가 세자가 되어야 하지만 李芳雨는 고려의 충신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를 李成桂가 說得하려 노력하지만, 李芳雨는 자신을 세자로 세운다면 왕씨 (高麗의 王族)에게 선위를 하여 高麗를 다시 세우겠다고 하며 아버지와의 연을 끊게 된다.
그러자 신하들은 李成桂에게 가장 능력 있는 王族 중 한 明을 세자가 되게 하라 要請하였고, 李成桂는 막내인 이방석 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불과 그의 나이 11세였다. 李芳遠을 비롯한 몇몇 왕자들은 內心 자신이 세자가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 정실의 소생도 아닌 李芳碩이 세자가 되니 모두 당황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이 모든 어이없는 일이 모두 鄭道傳의 머리에서 나온 策略이라는 것을 알게 된 李芳遠은 자신의 책사이던 하륜을 시켜 殺生簿를 만들도록 했고, 태조가 危篤하니 모두 궁으로 들으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王子─亂
李芳遠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李芳幹과 함께 軍事를 이끌고 宮闕로 들어가 殺生簿에 이근, 심효생, 장지화 등을 모두 죽이고 뒤이어 鄭道傳과 남은을 모두 제거한다. 그 후 세자가 된 자신의 이복동생인 李芳碩을 죽이고 그 동복동생인 이방번 李芳蕃도 살해하였다. 李芳遠은 이렇게 마침내 1차 왕자의 난 王子─亂을 끝마친다.
다음 날 이를 알게 된 李成桂는 李芳遠에게 입궐 명령을 내리고 병상에서 내려와 李芳遠을 죽이려 했지만 더 이상 子息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李成桂는 玉璽를 李芳遠에게 들려주고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함흥으로 떠난다. 이후 李芳遠이 몇 차례 李成桂를 모셔오려고 차사를 보냈지만, 야사에 의하면 李成桂가 모두 죽였다 하지만 실상과는 다르게 자신은 가지 않을 것이라며 잘 타일러 보냈다고 한다.
李芳遠은 玉璽를 바로 잡지 않고 둘째 아들인 李芳果에게 玉璽를 넘겨 王位에 卽位시킨다. 이에 不滿을 품은 넷째 李芳幹이 권력을 모두 독점하던 李芳遠에게 싸움을 걸게 되고 결국 李芳幹은 패배해 귀양을 가게 된다. 이를 2차 王子─亂이라고 하고 이 피 튀기는 권력 싸움에 질린 정종 定宗은 李芳遠에게 玉璽를 넘겨주고 마침내 朝鮮 3대 王으로서 李芳遠이 卽位하면서 王族 간의 피 튀기는 싸움은 일단락이 되게 된다.


Conclusion
두 번의 王子─亂 을 거치고 나서 태종太宗이 (이방원李芳遠) 즉위卽位 하였다 (太宗 卽位 1400년) 왕권王權을 강화强化 하려고 자신의 충신 忠臣들을 제거除去하고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해 국가 재정 國家再訂을 단단하게 하였고 세자世子였던 양녕대군 讓寧大君을 쫓아내고 평소에 영리하던 셋째 충녕대군 忠寧大君 (세종世宗)을 후계자後繼者로 삼았다. (1418년 세종 世宗에게 왕위 王位를 내주었다.) 太宗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처참히 죽였다. 자신의 같은 핏줄들을 죽여가면서까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을까? 이 王子─亂을 통해 이방원은 이성계의 미움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방원은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의 후반 우왕 때부터 조선의 초반 태종까지의 이야기를 본 Essay에서 다루었다. Essay를 다루면서 왕좌에 대한 치열함을 느낀 것 같다. 혼란스러워진 국가를 바라보기 힘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과 뜻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나라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통일 신라부터 고려, 조선, 대한제국까지의 한반도의 나라들이 멸망하고 사라지는 것이 그 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