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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plantagenet 2019 11/11 팀 a 대본 역사, 철학

세찬: Edward I

1239년 6월 17일 태어난 Edward I는 할아버지 John king 아버지 Henry Ⅲ와 사이가 매우 열악한 나머지, England의 국력 또한 매우 약했다. Edward I는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 Henry Ⅲ를 도와줌과 동시에 많은 위험에도 처했었다. Henry Ⅲ에게는 정적인 프랑스 혈통의 몽포르 귀족(Simon de Montfort)이 있었다. 몽포르 귀족(Simon de Montfort)은 Henry Ⅲ에게 반란을 일으켜 이기게 된다. 그때, 에드워드 1세(Edward I)와 헨리 3세(Henry Ⅲ)는 붙잡히게 되었다. 몽포르 귀족(Simon de Montfort)은 옥스퍼드의 조례(Provisions of Oxford)를 통과시킴으로 헨리 3세의 왕권을 제한해버렸다.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1세가 탈출을 한 후에, 반란군과 싸워 헨리 3세를 구해냈다. 이브샴(Evesham)에서 싸웠다고 하여 이브샴 전투(Evesham)라고도 한다. 그때부터 영국의 실질적인 왕은 에드워드 1세였고, 에드워드 1세 1270년 제 8차 십자군 전쟁에 합류하였는데, 예루살렘 왕이 휴전을 선언하자 에드워드 1세는 반대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복귀한다. 복귀한 후, 그는 바로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노력했고,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많은 법률을 제정한다. 법령을 통해, 봉건제로 교회의 힘이 강하자, 교회의 힘을 억눌렀고, 영주들이 지니고 던 땅들을 다시 분배하여, 영주들의 권력을 낮추었다. 에드워드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위해 많은 행실을 보여주었다. 또한, Wine 생산을 장려해서 나라의 재정을 모으려고 했다. 또 같은 이유로서 의회를 운영하는 것에 힘을 썼다. 시몽 드 몽포르를 적으로 정말 싫어했지만, 그의 의회(Parliament) 운영법만큼은 본받았다. 그가 England 의회의 기반을 다졌다. 왕족과 귀족이 대부분 프랑스어 대신 영어를 쓰는 것을 추천하기도 했다. Edward I는 중앙 집권화를 통해 England를 탄탄히 뭉치려고 했고, 대외적으로는 브리튼 섬을 통일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Wales

England 국들은 보통 Wales의 왕도 겸하면서 했다. 그곳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 또한 없었고, Wales를 통치하는 세력들이 정말 큰 사건을 내지 않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Edward I에게는 통치하는 세력들을 제압하고, Wales에서 실질적인 힘을 낼 수 있게 하였다. Wales를 정복하고 세운 성이 카나번 성(caernarfon castle)이다.

Scotland

당시 Northern Scotland에서 Alxendar Ⅲ는 1268년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사망했다. 연회를 베풀고, 술 잔뜩 퍼마시고 말을 타다가 낙마사를 당해버렸다. Alexander Ⅲ와 헨리 3세의 딸 마가렛이 결혼을 해서 낳은 자식이 마가렛 빼고 다 요절하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마가렛을 Norway’s king과 결혼시켜서 낳은 딸과 Edward I가 Edward Ⅱ와 결혼시켜 Scotland의 힘까지 얻으려 했으나 딸이 일찍이 죽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진다. 마침, Scotland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서 Edward I가 말했다. “자신을 Scotland‘s king으로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Scotland의 실질적인 지배자되도록 지원을 하겠다” 라는 말에 혹한 Scotland 영주 John Beliall이었다. 그러나 막상 Scotland의 군주가 되어보니 자신이 허수아비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나 군대를 일으키고, Edward I에게 전쟁을 벌이지만, 지게 된다. 그때부터 Edward I는 자신이 Scotland’s king 행세를 했다. Robert I가 나오기 전까지 Scotland에는 왕이 없었고, Edward I를 Scotland novel들이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온 반란군 윌리엄 월레스가 나서서 England 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위기를 느낀 Edward I는 토벌군을 보내서 윌리엄 월레스를 잡아서 보여주기식으로 처형시키고, 사지를 찢었다. Scotland은 날로 저항이 심해졌고, Scotland‘s king이 된 Robert I를 잡으러 Scoltand에 직접 원정을 가지만, 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원준;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에 발표할 topic은 EdwardⅡ입니다. 먼저 family tree를 알려드리자면 ~~~~~~~~~~~~ 자 이렇게 됩니다. EdwardⅡ의 brothers들은 모두 EdwardⅡ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EdwardⅡ는 신분이 낮은 사람과도 거리낌 없이 잘 지냈습니다. EdwardⅡ는 어릴 때부터 Piers Gaveston라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고 아버지인 EdwardⅠ 에게 Piers Gaveston를 위해 땅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자 손찌검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 Piers Gaveston을 추방시켜 버리죠. 하지만 Edward Ⅰ이 Scotland 점령을 할 때 병사하면서 죽게 되고 EdwardⅡ가 왕이 됩니다. 왕이 되면서 다시 Piers Gaveston을 데려오게 되죠. 그 후 Isabella와 결혼식을 올린 EdwardⅡ은 Isabella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닌 Piers Gaveston사람과 항상 함께하고 진한 애정 행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Isabella의 보석까지 Piers Gaveston에게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EdwardⅡ는 bisexual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Isabella는 wife로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이런 상황에 noble들은 Piers Gaveston에게 눈치를 줍니다. 또한 Philippe IV까지 noble들을 지원하게 되면서 EdwardⅡ는 할 수없이 Piers Gaveston을 추방합니다. 그리고 Philippe IV는 EdwardⅡ에게 Isabella를 합당한 대우를 해주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에 Isabella는 왕비로써의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Piers Gaveston는 밀입국을 시도하다가 참수 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추락해 버린 왕권을 되찾기 위해  Scotland를 침공하지만 참패를 하고 왕권은 더욱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중립파 귀족들의 힘으로 인해서 둘 간의 사이가 잠잠해 졌습니다. 이 상황에 EdwardⅡ는 자신의 옆에 Hugh Despenser와 그의 아들을 옆에 두게 됩니다. 그는 중립이었던 Wales 귀족들을 Edward편으로 두게 만든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은 권력욕이 강한 사람으로 Isabella의 권력과 또한 EdwardⅢ의 땅까지 가져가며 권력을 남용합니다. 이때 Lancaster의 Earl이면서 EdwardⅡ의 cousin이면서 반대파인 Thomas는 Edward를 내쫒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아서 EdwardⅡ를 쳤지만 EdwardⅡ는 빠르게 대처를 하고 자신을 공격한 모든 noble들을 처형시킵니다. 그러면서 영국 땅은 점점 피폐해져만 가고 Hugh Despenser는 계속해서 탐욕은 높아져만 갑니다. Isabella는 Edward 에게 Hugh Despenser를 내쫒아야 된다고 무릎을 꿇고 부탁을 했지만 그것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Isabella는 아들 Edward Ⅲ과 함께 친정인 France로 떠납니다. 그 당시 France는 Charles IV가 king이었습니다. 원래 영국 국왕은 France에 신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왕이 되면 프랑스 왕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되지만 Edward Ⅱ는 인사를 하지 않고 그에 France는 Gascogne를 침공합니다. Isabella는 Gascogne에서의 침공을 중재를 하며 프랑스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Hugh Despenser에 반역을 일으켰던 Roger Mortimer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집니다. Isabella는 Roger Mortimer와 France를 등에 엎고 Edward2에게 불만이 있는 귀족들을 모으고 Edward Ⅲ을 France noble과 약혼시키면서 자금을 얻고 Charles IV는 mercenar을 고용해 Isabella를 지원해줍니다. 결국 Hugh Despenser는 옷을 다 벗겨진 채로 산채로 organs가 적출되고 거세를 당하며 죽게 됩니다. Edward Ⅱ는 도망치다가 채포되어 감금 되었습니다. 감금된 채로 43세의 나이로 죽게 됩니다. 나중에 Edward Ⅲ은 Roger Mortimer을 반역죄로 채포해 죽입니다. 막대한 Isabella의 영지와 돈이 모두 Edward Ⅲ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종윤: 에드워드 3세


 가장 성공적인 왕 에드워드 3세는 어린나이에 랭커스터 백작 헨리의 후견으로 국왕에 올랐으며 실직적인 국정 운영은 어머니 이사벨라와 그녀의 애인 모티머가 하였다. 영국은 스코틀랜드와 끝없는 전쟁 중이었는데, 이사벨라 왕비는 평화 조약을 맺는다.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의 아들 데이비드와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안을 정략결혼을 시킨다. 그런데 에드워드 3세는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의 인식은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할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는 힘없는 에드워드 왕이었기에 조약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그는 즉위 직후 아직 끝나지 않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끝내기위해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왕으로 인정받았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무상으로 포기하였다. 

 어머니 이사벨라와 모티머가 아버지 에드워드 2세에 대항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프랑스 귀족 딸과 약혼을 시켰다는 말이 있다. 에드워드 3세는 1328년 1월 24일 요크에서 약혼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발렘 백작의 딸 필리파였다. 둘의 관계는 6촌 관계였다. 필리파는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지만 성격이 무척 좋아, 자비로운 왕비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18살이 되던 해에 자신이 국가 운영을 하기 위하여 모티머를 제거하고, 필리파가 왕비 대접을 비로소 받을 수 있게 된다. 

 본격적으로 통치를 시작하게 된 에드워드는 로버트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데이비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1332년 스코틀랜드 귀족을 대표하는 에드워드 벨리올이 데이비드에게 도전을 한다. 여기서 패배한 데이비드는 프랑스로 대피한다. 벨리올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는데에는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이 있었는데, 에드워드 3세는 정복을 목표로 지원을 했으나, 데이비드 2세가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에드워드 3세는 다 프랑스가 배후에 있다는 생각에 프랑스에 적대감이 들었다. 여기서 프랑스 카페 왕조의 대가 끊기면서 필리프 4세가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카페 왕조의 후손이다‘라고 주장을 했다. 프랑스 내 잉글랜드령 화복을 위해 이 왕위 계승권을 들어 프랑스 왕위와 영토를 달라고 주장을 하였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어의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결국 발주아 가문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자면 플랑드르는 정치적으로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던 곳이었다. 이 지방은 유럽 최대 모직물 공업지대로 번창하였고, 원료인 양모를 영국으로부터 가져왔다. 또 경제적으로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망해라’ 하면서 양모 공급을 중단해버린다. 일종의 보복적인 행동이다. 화가 난 필립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본토인 가스코뉴를 몰수하였다. 이 지방은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다. 여기서 100년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백년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중간에 전쟁하다가 휴전하고 하였으니 116년 동안이나 전쟁을 했을 것이다. 이 전쟁은 라인강 하류의 슬루이스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는데, 플랑드르는 영국을 돕는 대신 양모공급을 꾸준히 해달라는 의견을 내었고 가스코뉴로 가는 길을 열어주겠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45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도시를 휩쓸고 다니며 파리로 진격하다가 프랑스군에 저지당해 길을 틀어 북쪽으로 다시 약탈을 하러 나갔다. 에드워드 3세를 도왔던 이는 흑태자 에드워드라고 불렸던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었다. 흑태자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검은 갑옷을 입고 적을 잔인하게 척살했으며 영국에게는 영웅, 프랑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346년 8월 26일에 다시 크레시 언덕에서 만나 크레시 전투를 벌이는데, 결과는 프랑스의 대패로 끝이 났다. 전쟁 이후 칼레를 점령하고 끈질기게 버티다가 항복을 하게 된다. 칼레는 영국령이 되어 200년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메리 1세 때 잃게 된다. (로댕 작품의 칼레의 시민)크레시 전투에서 영국군의 주력 무기는 장궁이었는데, 프랑스 군의 자랑이었던 기병대도 모습을 드러내자, 영국의 장궁병들은 긴 화살로 쏘아 붇기 시작했다. 화살은 기병들의 말, 갑옷들을 모두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중세 100년간 지속 되었던 기병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크레시 전투 이후 에드워드 3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유럽 전역에 원인 모를 흑사병이 퍼지기 시작되었다. 이 흑사병은 중세 유럽 사회를 무너뜨렸고, 두 나라의 전쟁이 잠시 쉬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립 4세의 뒤를 이어 장 2세가 왕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가스코뉴와 툴루즈 등 잔혹하게 약탈을 하며 다녔다. 1년 뒤에 바로 다시 전투가 붙었는데, 이 전쟁을 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결과는 다시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장 2세는 이제 막 왕에 올라 전쟁의 경험이 없었던지라 패배를 하였고, 에드워드는 경험이 많은 자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결국 두 나라는 브레티니 칼레 평화협정을 내린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서남 지방을 모두 차지하는 것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서남지방의 아키텐 지역의 공작으로 임명되게 된다. 장 2세는 자신의 신하들과 병사들을 모두 프랑스에 남겨둔 뒤 자신과 자신의 아들만 영국으로 넘어간다. 아들 루이는 영국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돌아온다. 장 2세는 이 행동이 기사도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영국에 홀로 남는다. 장 2세는 포로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들은 프랑스에서 섭정을 하여 자금을 마련한 뒤에 아버지의 몸값의 10분의 1인 40만 크라운을 지불한 뒤 아버지를 데려오게 된다. 장 2세는 전쟁에서 희생한 자들을 위로한다며 파티를 열고 다른 지역에서도 빚을 지며 모아두었던 돈은 모두 다 탕진되고 장 2세는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장 2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샤를 5세는 통치를 잘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흑사병으로 인하여 나라 재정이 망가지고 통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물가가 오르고 흑사병으로 많이 죽다보니 임금은 계속해서 올라가게 된다. 또, 필리파 왕비가 죽고 엘리스 페러즈에게 빠지게 된다. 그녀는 필리파 왕비의 시녀였으며 15세에 왕의 정부가 된다. 이때, 에드워드의 나이는 50대였다. 권력의 실세가 된 그녀는 왕이 준 제물을 바탕으로 사업까지 하여 엄청난 부를 축척한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스페인의 왕인 페드로가 반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나자, 에드워드는 반란군을 몰아내며 아키텐에 많은 세금이 부과된다. 그리고 아키텐의 귀족들이 반란이 많아지며 아키텐 지역의 대부분을 잃게 된다. 이후 그는 병세 악화로 영국에 돌아온 뒤에 46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 3세는 1377년 6월 21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프랑스의 ‘잔다르크‘라는 10대의 어린 소녀는 믿기 힘든 활약을 보여준다. 군대를 이끌게 된 그녀는 처음으로 향한 곳은 ’오를레앙‘이라는 곳으로 간다. 이 곳은 파리와 함께 프랑스 양대 도시엿으나 오랫동안 영국군의 포위를 받고 있었다. 이후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오를레앙의 프랑스 군대는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잔다르크는 전투에 참여하게되고 가장 먼저 달려 나가며 화살을 맞아도 굴복하지 않았던 용사이다. 프랑스 군대는 잔다르크가 적진을 누비자, 기세가 오르기 시작한다. 결국 잔다르크와 프랑스군은 오를레앙을 포위한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한다. 하마터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던 프랑스는 잔다르크에 의해 기적적으로 승리하여 다음 목적지인 ’랭스‘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이 곳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태가 되는 프랑크왕국의 왕들이 대관식을 하던 도시였다. 그러나 이 도시도 영국이 점령 중이었다. 영국 헨리 6세가 성장하여 대관식을 하기 전에, 샤를 왕태자가 먼저 랭스에서 대관식을 해야만 했다. 잔 다르크는 먼 거리에 있는 랭스로 정면 돌파하며 투석기의 돌에도 맞고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도 많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고, 또 한 번 기적적으로 랭스를 점령하게 된다. 이후 페태자가 어린 소녀의 도움을 받아 랭스에서 대관식을 하며 정통성있는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등극하게 된다. 

 영국에서 한번 더 프랑스를 공격했는데, 프랑스 군은 잔 다르크에게 사기가 떨어져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영국은 잔 다르크를 잡아가게 된다. 소문으로만 들리던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아 말도 안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여, 그녀를 군사적 재판에 서게 해야 되는 것을 종교적 재판에 세워 총 7번의 재판 끝에 신의 계시가 맞다고 판결되어 화형에 퍼하게 된다. 이후 100년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동옥: henry IV는 사촌동생인 Richard II한테 (hereford,영국)해리퍼드 duke의 직위를 받았고 잘 살고 있었다 그당시 henry IV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henry IV의 아버지인 Johon of gaunt는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Johon of gaunt가 카스티야(castile,스페인(에스파냐))로 1386에 원정을 떠나게 되는데 이때 henry IV는 정치적으로 모습을 들어내게 된다. henry IV는  Richard II에게 반대하게 된다. henry IV는  Richard II의 측근들을 범법자라고 떠벌리고 다닌다  이에 왕에게 찍히게 되고 결국 1390년 henry IV는 피난겸 리투아니아(유럽의 동북부 폴란드 옆)와 프로이센(prussia(베른린 동쪽,(독일))으로 십자군 원정을 가게 된다 하지만 왕의 분노는 풀리지 않고 결국 헨리4세는 신하들과의 불화를 빌미로 삼아 국외로 추방하게 된다. 1399년 Johon of gaunt가 죽자 Richard II는 그의 영지를 빼앗고 그의 자식인 henry IV의 재산 또한 모두 빼앗는다. 이렇게 둘 사이는 더욱 악화되어 간다. 여기서   Richard II가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왕궁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아일랜드로 침략 원정을 떠난다 이때를 노치지 않고 henry IV는 군사를 일으켜 모든 것을 장악 한다 그리고 돌아온  Richard II의 항복을 받고 퇴위 시킨고 자신이 왕이 된다. 왕이 되고 그 후에 그를 왕으로 인정 하지 않는 세력들의 반란을 제압 하고 자신은 Edward III의 후손인 점을 내세워  왕권을 정당화 시킨다. 또한 자신들의 아들이 권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왕권 안정화와 발란 진압 등에 힘을 많이 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