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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과 공리주의(功利主義)의 해석 학교 및 사회교육개혁

2018. 9. 18() 동양일보 풍향계 논설문

교육개혁과 공리주의(功利主義)의 해석

한희송(ESI 교장)

 

벤담(Jeremy Bentham)이 철학사에서 맡은 역할은 근대적 공리주의의 건설이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그 내용은 본능적으로 쾌락적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등장한 물질주의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종교로부터 자유지대를 설정하고 여기에 쾌락이란 개념을 심는 일은 벤담이 추구하는 행복이 결국 '육체적, 물질적 쾌락'이란 시각을 형성케 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추상적 삶의 가치를 외면한다면 인간의 존재는 맛난 음식만을 찾아다닌다거나 남의 사생활이나 좇는 일로도 충분히 가치를 가진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었다.

 

벤담의 열렬한 추종자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밀(J.S. Mill)은 공리주의자로 자랐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적어도 철학적 아름다움을 가진 무엇이기를 바랬다. 그는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말 대신배고픈 소크라테스배부른 돼지라는 표현을 등장시킴으로써질적(質的) 공리주의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음식이 주는 행복의 최대치가 철학을 함으로써 얻는 행복을 침범할 수 없게 했다. 이후로 사람들은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의 행복을 비교했으며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응답자의 세속화정도를 평가했다.

 

교육은 지식을 쌓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지식은 사람의 존재가치에 대한 깨달음의 방향과 깊이를 정의하는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그런데 교육과 그 결과인 지식은 물리적 가치보다 추상적 가치와 더 가깝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에서 지금까지의 여하한 물질적 발달은 지식발전의 결과였지 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스승들은 스스로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의 발로로 지식이란 거대한 나무를 키워 왔다. 그들이 열정적으로 자신을 바쳐가며 얻고자 한 것은 자신의 가슴에서 생긴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물질적 보상은 늘 그 결과로써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 것에 불과했다. 만일 인간행복이 물질적 성과로 정해지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목숨마저 가벼이 던져 국가를 구하고 정의를 구하고 진리를 외친 저 위대한 분들로부터 위인전의 주인공이란 지위를 박탈해야 할 것이다. 대신 자신의 물리적 성취와 육신적 안위(安慰)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그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부의 주된 목적이 취직해서 돈 버는 것에 있으면 그 사회는 장기적으로 철학의 부재(不在)로부터 오는 허탈과 마주치게 되어있다. 공부로 인한 지식의 발전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가 지식의 발전을 필연적으로 동반하지는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의 공부는 하기 싫지만 미래의 물질적 고난을 피하기 위해 할 수없이 해야 하는 필요악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안정적이라면 공부는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우리나라가 인식하는 공부와 교육과 지식은 이미 그 이름아래 둘 수 없는 것들이다. 자유를 유보하고 인격을 경시하며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아야 선호되는 일을 차지하는 방법들은 자유와 인격과 고난을 통한 위대함의 발현이란 모습을 가진 공부, 교육, 지식과 어떤 상관성도 가지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천재로 구분되는 카이스트의 상위권 졸업생들이 게임업체를 선호하는 이유는 지식적 호기심 대신 더 높은 연봉이 이들의 인생을 정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지식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방송은 이제 전국을 다니며 끊임없이 먹거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높은 출연료를 주어 가며 보는 것으로 채워져 가고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것들에 집중하도록 강요되는 사이 어른들은 실제로는 진학의 형평성을 신장시키는 것에 불과한 입시제도, 평가제도 등의 형식들에 골몰하여서 교육개혁을 위한 노력을 한 것 같은 장면들을 연출한다. 공리주의는 우리나라에서만 오직양적(量的)’으로만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생의 가치를 아이들로부터 빼앗고 있다. 그것도 '교육'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이 폭력을 당장 멈추지 않으면 우리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가치를 성숙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어른들의 행태를 역사에 고발하고야 말 것이다. 그 치를 떨어야 할 현실을 역사가 지금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음을 우리 어른들이 느낄 가능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