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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에세이 동옥,동현,규현,세찬,태원,원준 2019 12월1일 역사, 철학

vl. 結論

미드웨이 海戰은 美國의 命運을 건 戰鬪였다. 太平洋 艦隊의 沈沒로 인해 太平洋에 대한 支配權이 喪失된 美國은 日本의 海軍을 막아내지 못하였고 그 結果 미드웨이까지 뚫리게 되면 本土가 直接 攻擊받을 危機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狀況에 놓이자 美國은 結局 미드웨이 海戰에 總力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日本의 計畫은 오히려 너무나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日本의 야마모토와 군 上府는 미드웨이를 占領하고 美軍 艦隊를 全滅시킨 후 알류 산 열도를 占領하여 濠洲를 威脅하겠다는 計劃을 세우고 있었다. 심지어 模擬 戰鬪를 해볼 때도 저 녀석들은 怯을 먹었고 별다른 것을 動員할 수 없다는 主觀적인 判斷에 빠져 이런 것을 저 녀석들은 생각할 수 없다며 最高의 시나리오만을 構想하였다. 結局 이는 變則적인 狀況이 많은 戰鬪 속에서 빠른 判斷을 하지 못하게 했고 이로 인하여 제대로 된 判斷을 하지 못한 日本은 結局 戰鬪에서 敗北하였다. 이러한 思想은 視察을 보낼 때도 나타난다. 美國은 偵察機가 不足하여 爆擊機와 戰鬪機까지 動員하여 40여 대를 보내 偵察한 것과는 다르게 日本銀 10기의 偵察機를 보냈을 뿐이었다. 이러한 部分에서 보인 差異는 結局 勝敗를 갈랐고 日本銀 航空 母艦 4기와 수십 수백 대의 戰鬪機를 잃어 진주만 襲擊 당시의 海軍의 位相을 喪失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日本 政府는 오히려 가짜 뉴스를 善戰하였다. 우리는 美國의 航空 母艦 3척을 壞滅시켰고 120대의 戰鬪機를 부쉈으며 海域이 美國 本土에 西海 地方까지 늘어났다고 하였다. 이는 심지어 軍人들과 皇室만 알았던 것인지 最高位 外交部 所屬 外交家가 3년 뒤 이 史實을 알고서는 衝擊에 빠졌다고 하니 一般 國民은 아무것도 몰랐을 可能性이 매우 크다. 이곳에서 우리는 배울 점을 한가지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日本의 歷史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는지 물어본다. 그렇다면 自身의 歷史만은 확실하게 알아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歷史 史料의 量은 中國, 日本에 비해 훨씬 떨어지며 심지어 韓國에 대해서 가장 많은 硏究가 進行되고 있고 歷史的 史料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는 美國이다. 우리가 歷史를 배우는 理由는 흔히들 過去에 한 失手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日本은 壬辰倭亂 이후 이순신(李舜臣, 1545~1598)에 대해서 徹底하게 調査했으며 太平洋 戰爭이나 中日 戰爭 등에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戰法을 使用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壬辰倭亂 이후에도 硏究는 전혀 하지 않았고 오히려 倭䎛이라고 蔑視만 하였다. 그 結果 日帝 强占期에 無視하던 民族에게 結局 支配당하게 된다. 그럼 日本은 미드웨이 海戰에 대하여 硏究를 하였을까? 正答은 그렇다. 日本은 敗北 이후 이를 徹底하게 硏究하였다. 그 結果 여러 狀況에 따른 對處 方式을 만들었으며 航空 母艦에 鐵甲을 둘러 强化하는 등 여러 가지 對策을 세웠다. 日本은 相對國이라도 배워야 할 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배우고 들어간다. 그 결과로서 壬辰倭亂이 있었고 日帝 强占期가 있었으며 太平洋 戰爭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壬辰倭亂에서 明那羅의 도움으로 간신히 敗北를 면하였지만 전 國土가 荒廢化되었다. 日本의 그러한 戰鬪力을 보고도 倭䎛이라고 불렀으며 日帝 强占期에도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獨立運動을 열심히 했다고 한들 日本이 美國에게 패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占領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韓國 사람들에게 日本은 어떻게 發展했냐고 물어보면 다른 那羅의 것을 베끼고 그것을 基盤으로 發展시켰다고 한다. 中國도 그러한 方法으로 爆發的인 成長을 이루었음에도 우리나라는 自身들보다 强大한 國家에게 짱개 혹은 쪽발이라고 부르면서 말도 되지 않는 自尊心만을 부리고 있다. 이제라도 지나친 歷史를 돌아보고 잘못된 점은 고치고 잘된 部分은 본받아서 發展해 나가야지 그저 根據 없는 말만 되풀이하며 時間을 보내는 것은 잘못됬다고 생각한다.